한국패션산업연구원(패션연)에서 불거진 연구개발비 부정수급 의혹은 규정에 없는 이유로 연구 책임자를 교체하는 방법으로 이뤄진 걸로 확인된다. 국가연구개발을 수행하는 연구기관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연구 과제를 강탈”하는 것이라며, 사실로 확인되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불법 사례라고 지적했다.
국가연구개발 사업에서 연구 책임자 교체는 명문화된 규정 이외 이유로 할 수 없다. 과제 수행 과정에서 연구 책임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구 책임자는 과제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부터 예산 집행까지 모든 업무에 책임이 있다.
때문에 산업기술혁신촉진법의 세부사항을 정해둔 ‘산업기술혁신사업 공통 운영요령’에는 “총괄책임자는 임의로 변경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해당 규정에 따르면 3가지 정한 상황에서만 전담기관 승인을 거쳐 책임자 변경이 가능하다. ▲책임자의 외국 체류 ▲국내·외 기관 파견 ▲6개월 이상 계속해 과제 수행이 어려운 경우가 책임자 변경이 가능한 사유다.
하지만 <뉴스민>이 관련 자료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 패션연은 최소 24차례 규정에 없는 이유로 연구 책임자를 교체했다. 국가연구개발 사업 정보를 제공하는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를 통해 확인되는 2012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패션산업연구원(패션연) 수행 과제는 모두 182건이다. 패션연 주관 또는 협동한 과제는 25건이고, 157건은 위탁 또는 공동과제다.
<뉴스민>은 이중 중도에 연구 책임자가 변경된 과제의 책임자 변경승인요청서를 확보했다. 확보한 자료를 보면 중도에 연구 책임자가 변경된 사례는 48차례다. 이중 단순히 ‘인사이동’을 이유로 책임자가 변경된 사례가 24차례였다. 이외 24차례는 퇴사(14), 출산휴가(8), 3책5공제(2과제 동시 수행 제한 규정)였다. 확보한 변경승인요청서가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이뤄진 모든 변경신청서는 아니여서 규정을 어긴 사례는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규정 위반 사실 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함께 야기한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우선 연구 개발을 수행하면 주는 연구수당이 자격 없는 사람에게 지급된다. 과제에 따라 연구수당은 천차만별이지만, 1개 과제에서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이른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패션연 연구원에게 지급된 연구수당만 3억 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된다.
연구 수행 과정도 문제가 된다. 패션연 관계자에 따르면 이런식으로 책임자가 변경되면, 실제 연구 수행 과정에서 중요 역할은 변경 전 책임자가 수행한다. 변경 된 책임자는 이름만 올려두게 된다는 거다. 패션연 관계자 A 씨는 “과제가 끝난 후 브리핑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뀐 책임자는 내용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어서 바뀌기 전 책임자에게 브리핑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만약 수행한 과제가 상업화에 사용되면 문제는 더 커진다. 상업화를 위해 기업에 연구 결과가 제공되면 기술이전료가 발생하는데, 이 돈을 변경된 최종 책임자가 수령하게 된다. 또 다른 관계자 B 씨는 “패션연 연구 과제가 기술 이전되는 사례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다른 연구기관 연구원 C 씨는 “연구 책임자를 바꾸는 일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다. 우리 연구원 사례를 들면, 출산 휴가 때문에 책임자를 바꿨다가 출산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이전 책임자가 다시 책임자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허용하지 않았다. 규정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C 씨는 “실력이 있거나 자격 있는 연구원이라면 본인이 직접 과제를 따서 책임 연구를 수행하면 된다. 연구 과제 책임자를 바꾸는 행위는 과제를 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