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집 근처 산에 다녀오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3월 말부터 그렇게 되었다. 진달래가 피고 개나리가 지천이다. 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벚꽃이 팝콘처럼 팡팡 터지다가 어느새 초록색 잎이 솟아나고 하얀 꽃잎은 눈송이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하루하루 마주한다. 계절의 도돌이표를 수도 없이 겪었지만 모든 탄생과 소멸은 늘 경이롭다.
내가 아침마다 산에 가는 이유는 처음부터 이 아름다운 생명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부지런한 인간은 아니다. 산자락에 함께 살던 개가 묻혀있다. 그저 죽음이 소외당할까 두려워 아침마다 죽음을 마주하러 나간다. 죽음은 사라짐이고, 그 사라짐이 아직 현실에서 와닿지 않으니 경계의 시간을 보내는 셈이다.
강원도 산불로 국가재난 사태가 선포된 와중에 “촛불 좋아하더니 온 나라에 산불”이라는 발언을 한 김문수를 보면서 망언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 산불을 두고 대통령이 만든 인재라는 둥 그야말로 아무말이나 마구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재앙은 바로 이들의 입에서 나온다. 재난을 정치적으로 즐기는 이들.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고 상실에 대한 애도를 할 줄 모르는 이들.
경쟁이라도 하겠다는 듯 이어지는 망언들은 일회적인 실수가 아니라 모두 정치적 행동이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 먹는다”며 세월호 참사 유족을 조롱하는 차명진의 행동도 정치 행위다. 재난과 고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집단은 ‘남의 고통’이 정치화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정치적 행동을 한다.
“죽음은 항상 노래하는 사람 한 명은 남겨 둬. 누군가가 애도는 해 줘야 하니까.”-‘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중
그렇다. 누군가는 죽음 뒤에 남아서 애도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캐서린 앤 포터의 문학은 여러 화두로 풀어갈 수 있지만 내게는 그가 꾸준히 죽음을 다루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애도가 배어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는 사람의 의식, 죽어가는 사람이 떠올리는 기억,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태도 등을 그의 단편 곳곳에서 발견한다. 포터가 콜로라도의 ‘로키 마운틴 뉴스’에서 기자로 일할 때 실제로 스페인 독감으로 거의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임사체험, 곧 죽음에 거의 다가가는 경험을 했다.
죽다 살아난 그에게 ‘살아있음’은 곧 ‘살아남음’이 된다. 그의 이 경험은 단편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에서 잘 표현된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이 몽롱한 작품은 주인공이 다시 깨어나며 밝아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승리인가, 얼마나 큰 성공인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살아남았다는 건 때로 ‘승리한 죄인’이라는 감정을 안긴다. 살아있음이 부여한 권력을 성찰한 태도는 다른 작품에서도 곧잘 보인다.
“삶의 위력은 패배한 망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완강하게 마리아 콘셉시온의 편을 들어 주었다.”-‘마리아 콘셉시온’ 중
“에이미는 죽었고 자신은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오랜 죽음의 운명’ 중
죽음에 다가갔던 경험은 포터에게 ‘삶의 위력’을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이 위력을 가진 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옛질서’에서 주인공 미란다는 “움직이지 않거나, 소리를 안 내거나, 어딘가 살아 있는 것들과는 달라 보이는 생명체를 발견하면 반드시 땅에 묻어 주었다.” 메뚜기도 묻어 주는 미란다는 “밥을 먹여 줄 수 있는 새끼 동물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다.” 바로 삶과 죽음을 모두 돌본다.
반면 그의 작품 속에서 남성다움에 환장하는 인물은 돌봄을 경멸한다. 병사들을 치료하는 나이팅게일이 전쟁을 망쳐 놨다고 주장하며 “그딴 건 전쟁이 아니야. 싸우다 죽으면 거기서 썩어 가게 놔줘야지.”(‘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옛질서’에서 미란다의 할머니는 “주위 모든 사람이 기꺼이 자기 시중을 들어야 마땅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남자들에게 지쳤고, “이기적이고 무심하고 애정 없는 인간들이 끝까지 그렇게 살다가 죽는”, “남자들 특유의 고질적인 악습”에 진저리친다.
포터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인물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의 애덤이다. 그는 헌신적으로 ‘죽음’을 돌본다. 주인공 미란다는 애덤에 대해 “아무런 의식도, 행동도 않고도 그는 죽음에 온전히 헌신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소설에서 애덤은 죽어가는 미란다의 곁을 지키며 믿음직하게 간호한다. 실제로는 포터가 스페인 독감에 걸리자 애덤의 모델인 포터의 애인은 즉시 곁을 떠났다.)
커다란 산불로 삶의 터전뿐 아니라 죽음의 장소까지 사라졌다. 산은 그런 곳이다. 죽은 사람과 동식물이 묻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산 사람이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포유류뿐 아니라 조류와 어류를 포함하여 식물, 각종 미생물이 서식하는 장소다. 숲이 회복되려면 결국 100년이 걸린단다. 자연이 회복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인간의 삶보다 더 길다. 삶은 상실로 가득하다. 죽음을 돌볼 시간을 가지기. 애도의 권리. 이는 인간적 삶을 위한 기본적인 권리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너무 흔해서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종종 잊는 시. 윤동주의 ‘서시’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제 삶을 살아가기.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인 장애진 씨가 사람을 구하고 싶어 응급구조를 전공했다는 보도를 보고 ‘서시’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시가 내게 구체적인 메시지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삶의 위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최전선의 정치가 아닌가 싶어 많은 생각이 오갔다.
살아있는 이에게 밥을 먹이지도, 죽음을 애도할 줄도 모르는 이는 어떤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죽음을 돌보지 않는 자는 산 자에게 밥을 먹이기는커녕 언젠가 산 자를 잡아먹을 것이다. 죽음을 모욕하는 자는 삶을 모욕한다. 그런 이들은 산 자를 위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