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정신병력으로 인한 묻지마 범죄’일까. 지난 17일 경남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한밤중에 40대 남성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흉기를 휘둘러 5명이 숨지고 13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용의자가 조현병을 앓았다는 진술을 확보했고, 경찰은 브리핑에서 용의자가 ‘조현병으로 공주치료감호소에서 보호관찰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추후 보도를 통해 용의자가 이미 과거에 흉기를 휘두른 범죄를 저지르고도 심신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감형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에 불이 붙었다. ‘진주 방화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관용 없이 처리하라’는 글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것이다.
묻지마 범죄도 아니고 조현병이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그것이 무관용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이다. 용의자는 심문을 위해 법원으로 이동할 때도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사과 없이 ‘내가 사회에서, 직장에서 어떤 불이익을 받아왔는지 조사해보라’는 말을 남겼다. 사회에 대한 분노라는 명확한 동기가 있었고, 용의자의 칼부림에 희생당한 사람은 여성·노인·어린이로 전형적인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따라서 ‘묻지마 범죄’라는 표현을 들으면 으레 떠올리는 ‘우발적 동기, 대상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오히려 묻지마 범죄보다는 증오 범죄에 가깝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증오’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증오는 개인적인 감정이지만, 증오의 대상과 이를 표출하는 상대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 조현병 환자는 살인을 하지 않는데 왜 남성 조현병 환자는 번번이 사람을 해치는가’, ‘약자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이므로 사실상 약자혐오범죄다’ 같은 주장들이 나오는 이유다. 발언의 강도나 납득의 정도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는 충분히 가늠해볼 만한 문제다. 두 주장 모두 ‘약자를 공격해도 되고 심신미약을 주장하면 처벌도 경미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 배경은 결국 어디에서 온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해진다.
문제가 이처럼 확장되면 사회 각계각층에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할 주체들도 많아진다. OECD 평균 3분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예산 책정, 치료감호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용의자를 수용하지 못한 제도상의 미비, 사건 이전에 징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동 대응을 하지 못한 경찰력의 문제, 혹은 초동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든 배경까지 문제는 수도 없이 제기할 수 있다. 묻지마 범죄-정신병력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논리 구조는 실은 이 문제에 대한 응답과 비용을 은폐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에 불과하다. 묻지마 범죄와 정신병력이 더해지면, 사건은 ‘단순히 악마적인 개인이 벌인 일탈’로 축소된다. 이렇게 되면 해결책은 대부분 정신병에 대한 가혹한 통제와 격리로 쏠리게 되기 마련이다.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을 모두 잡아 가두고, 범죄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도 마치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게 된다.
이번 사건은 묻지마 범죄도 아니고 정신병력과 심신미약 감형의 문제로 축소되어서도 안 된다. 범행 동기와 배경에 천착하지 못하고 대충 ‘정신병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식으로 보도하면 그 값은 결국 또 사회가 치르게 된다. 정신병에 대한 편견은 재생산될 것이고, 강력한 처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엄벌주의만 강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범인이 얼마나 이상하고 악마적이며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인지를 부각하는 것이 아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정신병력으로 인한 묻지마 범죄’로 이 사건을 다루는 것을 멈춰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