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서 끌려가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 허위진술 강요받았다”

[83년 대구미문화원폭파 빌미 고문 재심] 허위진술 강요 받은 피해자 증인 출석

13:24

전두환 정권 시절 발생해 결국 미제사건으로 끝난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은 대구에서도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당시 이 사건을 빌미로 불법 구금돼 고문받은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9일, 재심 재판 다섯 번째 공판에서 새로운 증인이 나와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당시 수사기관의 허위 진술 강요 내용을 증언했다.

1983년도에 경북대학교 3학년이던 성지훈(가명, 59) 씨는 같은 해 9~10월경 하숙집 화장실에서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갔다. 기록과 정황을 살펴보면 끌려간 곳은 원대동 대공분실이었다. 이곳에서 성 씨는 약 2달간 영장도 없이 구금됐다.

구금된 상태에서 성 씨는 조사관으부터 지속적으로 진술서 작성을 요구받았다. 처음 진술 내용은 2장. 내용이 부족하자 성 씨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받았고, 고문을 받을수록 진술서가 늘어났다. 비몽간 진술한 내용은 수십 장을 넘어섰다. 더 이상 진술할 내용이 없는데도 조사관은 다른 사람의 진술 자료를 보여주며 진술을 강요했다. 성 씨는 자료에 나온 대로 진술했고, 그 진술은 재심 신청인이자 고문 피해자들인 박종덕(59), 함종호(61), 손호만(59), 안상학(57), 우상수(사망) 씨들의 유죄 증거로 사용됐다.

1983년 10월 27일 대구직할시경찰국 수사과가 작성한 성 씨의 진술조서에는 성 씨가 허위 진술한 내용이 남아 있다. 9일 재심 재판에 참여한 성 씨는 30여 년 만에 자기 손으로 쓴 진술서를 봤지만, 진술서에 적힌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진술서에 따르면, 성 씨는 대구시 북구 산격동 모처에서 박종덕 씨와 함께 의식화 학습을 했고, 산격동 대도시장 한 빵집에서는 박종덕 씨와 함께 테러를 위한 폭발물 마련을 모의했다. 또한 박종덕 씨와 경북대 학생 시위를 음모했으며, 당시 자리에는 안상학, 우상수 씨도 있었다는 내용도 내온다.

▲성지훈 씨가 1983년 경찰에 진술한 진술조서

대구직할시경찰국은 1983년 11월 3일, 미문화원 폭파 사건에 대해서는 미제사건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성 씨는 같은 해 12월 25일까지 억류 상태로 있었으며, 25일 강제로 군대에 징집됐다. 군대에서 성 씨는 녹화사업 대상자로 분류됐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대 초반 녹화사업을 통해 소위 운동권 학생을 강제징집해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

이날 검찰은 성 씨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하며 진술서 작성 경위와 가혹행위 여부를 물었다. 또한, 박 씨가 당시 유죄 판결을 받은 반공법·집시법·국보법 위반 행위에 대해서도 사실인지 물었다.

성 씨는 자술서 작성 경위에 대해 “하숙집에 있는데 갑자기 연행됐다. 수사기관 억류 상태에서 12월 25일 강제징집됐다”라며 “(테러용 폭발물 개발 관련 내용 등은) 금시초문이다. 제가 그런 말을 적었다면 실성했거나, 주는 자료를 받아 적은 것이다. 당시 자료 대로 안 적으면 잠을 안 재웠다. 진술조서를 강요하며 뺨을 때리거나 볼펜으로 찍었다. 요구하는 대로 적어줘야 재워줬다”라고 말했다.

성 씨는 “이 자리에 나오기 싫었습니다”라고 하며 말을 맺었다.

“어릴 적 부끄러운 이야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기억 짚어보니, 대학교때 읽은 것은 교양 정도 수준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끌려갔습니다. 처음부터 전두환 욕을 했느냐, 군부 독재 타도를 왜쳤느냐 하고 물었으면 수긍할 건 있었습니다. 갑자기 하숙집에 있다가 끌고 가서 김정일파냐 김일성파냐, 광주가 고향이냐, 광주에 친구가 있느냐. 그렇게 물으면서 때리고. (조서) 안 베낀다고 패고. 그래서 저는 수긍해서 또 내용도 모르면서 적으면서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걸 평생 안고 살았습니다. 이 자리에는 저 나름대로 치유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한편, 다음 공판기일은 오는 5월 23일이다.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박 씨 등 신청인들이 유죄라고 진술했던 다른 증인을 소환해 증인신문을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