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이 다시금 화제다. ‘꼬마동화 작가’ 전이수 군이 동생 생일날 레스토랑을 방문했다가 노키즈존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거부당한 일화가 대중의 관심을 받아서다. 당시 전 군의 아버지는 야외 테이블에서라도 식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 군의 동생 우태는 돌아가는 내내 “먹고 싶어! 아무 말 안 하고 먹으면 되잖아”라며 울었다고 한다. 노키즈존으로 인해 상처받은 아이 얘기에 네티즌들은 “노키즈존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먼저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린이들의 당연한 권리를 제한해서 미안해요” 등의 반응을 보였다. 나 역시 전 군 의 사연을 통해 노키즈존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노키즈존은 아이의 존재를 지워버린 표백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혐오가 작동해 만들어졌다. 가게 출입에 대한 이중 잣대가 이를 방증한다. 노키즈존은 다른 손님의 편의를 보장하고 매출 하락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사업주에게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카공족과 다른 이용객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떠드는 진상손님에 대한 출입은 막지 않는다. 정숙을 요구하거나 스터디를 금지하는 등 행위를 규제할지언정 대상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유독 아이의 존재만 배제한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혐오가 문제해결보다 대상을 배제하는데 집중하고 권력 관계상 위에서 아래로 작동한다는 속성을 알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노키즈존은 혐오가 구체적으로 실행된 차별적 공간이다.
일부 대중은 아이가 아니라 몰지각한 부모가 문제라고 말한다. 흔히 얘기하는 ‘맘충’에 대한 지적이다. 나 역시 KTX 열차 안이나 카페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를 많이 봐왔기에 일견 타당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지적이 사회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논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여전히 노키즈존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부모에 대한 지적은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를 어떻게 제지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신 노키즈존이라는 방식을 합리화하는 논리로만 동원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혐오의 또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는 점이다.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 못지않게 주변에 민폐를 끼칠까 걱정하는 부모들을 봐왔다. 그런데 인터넷상의 일부 사례만 가지고 부모, 특히 엄마를 일반화하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고착화한 뒤 혐오하는 행태가 만연하다. ‘맘충’이라는 전형적인 혐오표현이 이를 잘 보여준다. ‘맘충’이라는 단어 탓에 엄마들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스스로 위축된다고 한다. 일부 몰지각한 부모에 대한 지적이 노키즈존의 대안을 탐색하기는커녕 혐오를 확산시켜 피해자만 더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해결책은 노키즈존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공회전 중이다. 왜 그럴까? 가장 간편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문제를 일으킨 뒤에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하기보다 아이의 출입을 금지시켜 문제의 소지 자체를 없애는 게 가장 편해서다. 그렇다면 이 간편한 방식의 수혜자는 누구일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아이의 성숙을 위해 도움을 줘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무를 방기하고픈 시민 일반이다. 아이가 예절을 배우고 성숙해지기 위해선 사회적 경험이 필수다. 그 과정에 연루된 시민들은 관용을 베풀 의무가 있다. 은유 작가가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며 어른이 됐다”고 썼듯 우리 모두는 시민들의 관용에 기대어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 스스로가 아이의 귀여움만 탐닉하고 공동체 일원으로서 의무는 방기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볼 일이다.
2014년 노키즈존이 처음 등장했다. 당시만 해도 노키즈존은 사업주의 고충과 다른 이용객의 편의를 고려해 쉽게 용인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어떤 행위를 규제하는 게 아닌 특정 집단 자체를 배제하는 일은 항상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한다. 특히 그 배제가 공동체의 의무를 방기하고 혐오를 조장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합법적으로 공동체의 의무를 제거한 노키즈존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다시 시작할 때다. 늦었지만 미룰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