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영어권에서 유행했던 ‘야한 농담’(dirty joke)이 있다. 뜻하지 않게 가난한 농부와 슈퍼모델이 무인도에 난파하게 됐다. 어떻게 하다 보니 둘이 만리장성을 쌓게 됐는데, 다음 날 아침 슈퍼모델이 농부에게 지난밤 어땠냐고 물어본다. 잠시 생각하던 농부는 슈퍼모델에게 잠깐 자기 친구처럼 연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흔쾌히 슈퍼모델은 분장까지 하고 친구 노릇을 해준다. 그러자 만면에 희색을 띤 농부는 슈퍼모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세상에 내가 말이야, 슈퍼모델과 잤어!”라고 말한다. 실없는 농담이지만, 한 철학자는 이 농담을 인용하면서, 쾌락의 실현은 궁극적으로 대타자(the Other)라고 부를 수 있는 삼자의 시선을 통해 완성된다고 갈파했다.
까도 까도 양파처럼 드러나는 버닝썬 사태를 보면서 이 오래된 농담에서 느꼈던 민망함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농담을 인용한 철학자의 의도는 농부와 친구의 공모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모를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에 대한 발설이다. 이 구조야말로 정확히 지금 버닝썬을 둘러싼 공모관계의 정체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욕망의 구조는 무엇인가. 클럽에 온 여성들에게 약물을 몰래 먹여서 이른바 VIP에게 공급하는 범죄를 ‘사업’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구조이다. 그렇게 육체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과정을 몰래 촬영하고 카톡방에 공유하면서 시시덕거리는 짓을 정당한 놀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구조이다. 이 구조야말로 지금 한국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쾌락의 대타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이 구조를 만들어내는 대타자는 여성을 ‘사냥감’ 취급한 남성의 공모관계이다.
버닝썬은 이른바 강남 클럽 문화의 연장선에서 출현했다. 이 강남 클럽 문화는 90년대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소비문화의 고갱이라고 부를만하다. 당시에 유행했던 용어가 바로 신세대 문화였는데, 보수언론들은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세대라고 신세대를 규정하면서 과거 80년대 대학가의 운동권 문화와 구별짓기를 시도했다. 이 구별짓기의 목적은 탈정치화에 있었다. 386세대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정치적인 문제에 민감했던 집단주의적인 80년대 대학생과 비교해서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90년대 대학생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문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보수언론에 손발을 맞춰 이른바 신세대 문화의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상찬했던 지식인들도 많았다. 서로 다른 목소리이긴 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외쳤던 것은 강남을 필두로 등장하던 당시의 신세대 문화가 과거와 단절한 새로운 문화라는 주장이었다.
얼핏 그렇게 보였다. 밤을 잊은 강남 문화의 불야성은 한국 자본주의를 축복하는 폭죽 같았고, 장밋빛 미래를 기약하는 황금광 시대의 네온사인 같았다. 외국물 좀 먹은 현대적 개인주의자들이 노는 멋진 신세계가 바로 강남이라는 약속의 땅이었던 것이다. 버닝썬 사태는 바로 이렇게 휘황찬란해 보였던 강남 문화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격이라고 할만하다. 강남 클럽의 마약 문제는 이전에도 종종 언론의 보도를 탔지만, 지금처럼 클럽 운영자들이 조직적으로 여성을 ‘사냥’해서 단골고객들에게 ‘상납’을 했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버닝썬에서 벌어진 일은 지금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는 고 장자연 씨 사건의 전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버닝썬에서 영문도 모르고 낯선 남성 고객들의 방으로 끌려들어간 여성들 모두가 고 장자연 씨와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버닝썬의 이문호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승리의 3년 전 카톡 내용이 죄가 된다면 대한민국 남성들은 다 죄인 아닌가”고 말했다. 앞서 이야기한 농담으로 돌아가서 말한다면, 이런 주장이야말로 정확히 대타자의 시선에 대한 언급이다. 승리가 카톡 대화방에서 키득거리는 그 순간 그에게 쾌락을 선사한 이 대타자의 시선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이 문제를 과연 개인의 일탈 행위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 대표의 말처럼 이 대타자는 그 무엇도 아닌 버닝썬에서 재미를 보려고 공모한 남성 일반의 시선이자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다. 버닝썬 사태는 이윤축적의 제물로 끊임없이 약자들을 갈아 넣는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이다. 이 약자들이 여성이라는 것은 한국의 현실에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른바 ‘성상납’과 이런 현실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버닝썬 사태가 국내 언론에 보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외신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기자는 “세계화의 상징이라고 할 한류 스타가 관여하던 클럽에서 기성세대의 부패와 비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고 물었다. 긴 설명을 덧붙인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낳을 뿐이다.” 세대교체만 되었을 뿐, 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