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자연 씨 관련 보도가 유독 많았다. 비극이 일어난 지 벌써 10년이 됐고, 함께 일한 동료 배우가 책도 냈기 때문이다. 장자연 씨 사건은 밝혀진 것 보다는 밝혀지지 않은 게 더 많은 사건이다. 유야무야 잊혀지는 게 아니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들이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 같다.
다만 이 사건이 ‘악당 대 정의의 사도’라는 구도 속에서 소비되는 일도 있는 것 같아 걱정도 된다. 장자연 씨의 비극은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어느 악당들이 ‘힘 없는 여성’을 짓밟는 등의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을 한 것이므로, 이런 악당들을 뿌리 뽑아야 사건이 종결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악당의 악행과 이를 쫓는 영웅들의 정의감을 동시에 과장하는 표현들이 많아지고 있지 않나 한다. ’장자연’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간 기사를 인터넷에 송고해 ‘클릭 수’를 확보 하려는 일부 언론과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방송인 등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악을 척결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 이외에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고, 뭔가 악당을 혼내주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양심의 가책을 남길 일이 없다는 점에서 ‘악당’을 제외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장자연 씨와 같은 피해자를 다시 없게 하려면, 물론 악당을 혼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과 악의 구도를 넘어서 사건의 원인을 만든 근본 구조가 무엇인지를 직시하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장자연 씨 사건은 크게 세 가지 층위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여성이자 연기자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넘는 일을 강요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남성이 거의 모든 일에 있어서 여성을 도구화 해 착취할 수 있도록 하는 가부장적 구조가 작동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강요가 작동할 수 있는 배후에 기획사의 요구를 거부했을 경우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끝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적 착취를 고리로 한 연기자와 기획사 간의 불평등한 계약 관계이다.
세 번째는 자신들의 이익을 재생산하기 위한 정치-경제-언론의 동맹이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라는 공통분모를 드러내는 것을 조직적으로 무력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특히 수사기관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장자연 씨 사건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검경을 불문하고 수사의 총체적 부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최대의 언론권력이 관계돼 있고, 권재진 전 법무부 장관 등 당시 정권과 가까운 검찰 출신 인사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건이기 때문도 할 것이다. 이 정부 들어 검찰 개혁을 전제로 만들어진 검찰의 과거사조사위는 이 사건을 재조사 대상 중 하나로 선정했다. 과거 검찰 수사의 미진함을 스스로 반쯤 인정한 것이다. 재조사 결과는 과거사위 활동이 끝나는 이달 말 공개 될 예정인데 성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통화기록 등 수사 자료가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검찰 과거사위가 재조사 중인 비슷한 사건으로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성접대 의혹이 있다. 이것 역시 정권과 가까운 검찰 고위급 인사와 건설업자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고리로 유착한 사실이 은폐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최근 KBS는 박근혜 정부에 김학의 전 차관을 추천한 인물이 최순실 씨라는 증언을 검찰 과거사위가 확보했다는 보도를 한 바 있다. 그만큼 권력과 가까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수사기관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도 검찰 과거사위는 당시 디지털 증거물 등 수사 자료를 검찰에 제대로 넘겨주지 않았다며 경찰에 소명을 요구했다. 언론 보도를 통해 나오는 경찰의 분위기를 보면 오히려 수사를 해태한 것은 검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검경수사권 조정 등이 ‘뜨거운 감자’인 이때에 검경이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듯 한다는 것은 역시 ‘뻔한 결론’을 예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뻔한 결론’이란 장자연 씨 사건이나 김학의 전 차관 사건 모두 이런 저런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지만 진상을 밝힐 수 있을 만큼의 결정적 단서를 잡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자연 씨 사건이나 김학의 전 차관 사건과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첫 걸음인 검찰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이다. 검찰 출신 대표를 내세운 자유한국당이 겉으로는 검찰을 정권의 하수인으로 매도하면서도 뒤로는 온갖 민원을 접수해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보수언론은 이런 저런 트집을 잡아 검찰 개혁의 명분을 파괴하는 엄호사격을 담당하고 있다.
가장 난감한 것은 개혁의 대상이 될 이들이 개혁을 하겠다는 세력을 옭아매 ‘그 놈이 그 놈’인 판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제에 대한 검찰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여의도 주변에선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제가 검찰 개혁에 미칠 영향을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등 설치의 당위는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규정에서 도출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검찰이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라는 반론을 제기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때 중수부 해체 시도가 무력화 됐던 것도 같은 논리였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항의를 하겠다며 대검찰청을 점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 같다. 검찰로서는 “검찰 개혁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야당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어떻게 수사를 설렁설렁 하겠느냐”는 항변(?)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 과연 검찰 개혁이 충분한 수준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정권이 추진하는 검찰 개혁이 이뤄진다고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검찰 개혁은 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두 갈래로 추진되고 있는데, 검경 수사권 조정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검찰 권력을 줄이고 경찰 권력을 늘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또 다른 차원에서 검찰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이걸 보여주는 것이 버닝썬 사건이다. 버닝썬 사건에서 경찰은 대형 기획사를 배후로 두고 있는 ‘클럽’과 유착해 결과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재생산하는 공범의 역할을 했다. 동아일보 등이 보도한 후임이 윗사람에게 밥을 산다는 경찰의 특이한 문화는 조직 내에 현장과 유착하는 일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클럽이나 유흥업소가 밀집해있는 지역의 경우 이러한 유착관계의 바닥에는 여성에 대한 이중 삼중의 착취가 존재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검찰과 경찰의 차이는 그들이 봐주거나 암묵적으로 범행에 동조하는 대상이 여성 연기자를 착취하는 권력자인지 아니면 ‘클러버’의 여성 착취를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대형기획사인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검찰 개혁이란 아랫돌 빼서 윗돌에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일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장자연 씨의 비극은 바로 이 구조를 깨부술 수 있을 때에야 완전히 해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불합리를 바꾸겠다며 ‘피플파워’를 자처하는 정권은 이 구조에는 손 끝 하나 대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인터넷 음란사이트 차단에 분노하며 장자연 씨 사건에 대해서는 “여성단체들은 지금껏 뭘했나”라고 말하며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 등 미투 폭로를 은근슬쩍 폄훼하는 사람들의 눈치나 봐야 하는 처지이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사람들이 직접 들고 일어나는 것뿐이다. 권력의 본질은 사회적 갈등이 거리에서 표출될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판국이라면 악당을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기에 앞서 부끄러움부터 느껴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