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몸의 흥분’을 노래하기 / 이라영

11:28

강동수의 소설 <언더 더 씨>의 일부 문장이 논란이 되었었다. 세월호 희생자를 부적절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문장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외에 내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언더 더 씨’의 주인공이 ‘여학생’이라는 점이다. 강동수는 세월호 참사에서 시신 수습이 되지 않은 ‘실종자’ 혹은 ‘미수습자’를 화자로 소설을 썼다. 현재 세월호 사건에서 미수습자로 불리는 이들은 모두 5명이다. 9명이었던 미수습자는 2017년 세월호 인양 이후 선체에서 몇 사람의 유골을 확인하면서 5명이 되었다. 2017년 5월 25일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남성 다섯 명이다.

“미수습자 중 단원고 남현철·박영인 학생, 단원고 양승진 교사, 권재근 씨와 혁규 군 부자 등 5명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다섯 명 중 여성은 없다. 남학생 두 명과 남성 교사 한 명, 부자, 이렇게 다섯 명은 모두 남성이다. 강동수의 소설집 <언더 더 씨>는 2018년 9월에 출간되었다. 2017년 5월 이전에 집필이 끝났을 수 있다. 혹은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애초부터 중요하지 않았거나. 그렇다면 왜 작가에게 미수습자는 ‘여학생’으로 표현되어야 했을까. 실제 남은 미수습자에 여학생이 없음에도 왜 여학생으로 표현했을까. 희생자들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구성하지도 않았고, 특정인의 개별적인 서사에 집중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실제 미수습자가 모두 남성임에도, 그중 세 사람은 교복을 입지 않는 사람임에도, ‘교복 입은 여학생’이라는 희생자를 통해 (그의 말대로라면) 진혼굿을 벌여야 했을까. 달리 말하면, 그는 왜 다섯 명의 남성 미수습자를 향한 진혼굿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 속 희생자를 여학생으로 설정할 수도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니까 작가가 그렇게 설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여학생이라는 화자의 시각과 목소리가 충실히 담겨야 한다. 일반적으로 10대 여성이 제 가슴을 두고 ‘젖가슴’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여성의 가슴을 두고 ‘젖가슴’이라 부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그 가슴을 바라보는 남성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화자는 여학생이 아니라 그 여학생을 바라보는 ‘어떤 남성’이 되어 버린다. 여학생의 목소리를 전하는 듯 하지만 그 문장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읽히고, 여학생은 ‘화자’가 아니라 자두와 같은 사물로 변환된다. 여학생이 화자인양 꾸몄지만 실은 여학생을 사물화한다. 자두를 먹은 기억을 떠올리는 여학생의 시각이 아니라, 자두를 먹는 여학생을 바라보는 한 중년 남성의 성적 판타지다.

게다가 이런 표현은 이제 너무 진부하여 문학적 표현을 고민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읽힐 지경이다. 한 인간의 존재 상실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젊은 몸의 상실’을 아쉬워하며 애도의 대상을 에로티시즘의 대상으로 전환시켜버린다. 한 존재의 죽음을 싱싱한 몸의 소멸로 국한 시킨다. 나이가 많거나 남성인 경우 이 ‘싱싱한 몸’이라는 소재로 활용하기에 매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혼굿의 대상은 ‘소녀’여야 했던 것일까. 여성의 죽음은 남성의 죽음과 달리 성애화하기 좋은 소재다. 어차피 살아있는 여성도 인격적으로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여성은 더욱 ‘편하게’ 성적 대상화한다. 그래서 “생기발랄한 여학생의 삶”을 과일로 은유한다. 10대 여성을 화자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10대 여성의 탈을 쓴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위험한 문학이다. 발에 밀가루를 바르고 어미 양 흉내를 내며 어린 양들을 속이려는 늑대처럼 어설픈 분장이다.

애도의 대상이 에로티시즘의 대상으로 뒤바뀐다면, 해마다 발렌타인 데이에는 로맨스를 애국으로 방해하려는 이들의 연례행사를 본다. 몇 년 전부터 2월 14일만 되면 유치하게도 ‘초콜릿 주는 날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이라고 언론이 나선다. 로맨스는 방해하는 한편 폭력적이고 도착적인 성애를 부추기는 사회다. 클럽에서 여성들을 ‘제공’하는 사건을 접하며 그동안 나이트클럽에서 여성 손님은 무료거나 할인을 해준다는 광고를 다시 떠올렸다. 여성은 클럽에서 화려하게 다듬어 나오던 과일과 동격이니 제 발로 걸어오는 과일들을 환영한다.

마사 너스바움이 <혐오와 수치심>의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월트 휘트먼의 시 ‘나는 몸의 흥분을 노래한다’를 인용한 까닭이 있다. “오, 나의 몸이여! 나는 다른 남성과 여성에게서 너와 같은 것을, 너의 일부와도 같은 것을 지우지 못한다.” 바로 이 사회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인간 존재의 몸을 대하는 자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풀잎>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특히 ‘나 자신의 노래’를 통해 ‘나’를 시의 소재로 삼았다. 여기서 ‘나 자신’은 신과 동격이고 나의 세계가 곧 우주이다. 그 ‘나’는 자연과 사물, 세상의 다양한 계층이 모두 스며든 ‘나’이다. 노예와 ‘창녀’, 원주민 등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기에 ‘나의 노래’에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등장한다. 몸의 감각과 뒤섞임을 찬양하고, 세상 만물을 평등하면서도 개별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는 그의 시에서 독자적인 나와 타자는 서로 잘 직조되어야 하는 관계에 놓여있다.

“내게 속하는 것은 그대에게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게 속하는 모든 원자는 그대에게 속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이처럼 우리는 개별적이면서도 서로에게 속하는 존재다. ‘그대’가 없는 ‘나’는 있을 수 없기에 ‘나’를 노래하며 휘트먼은 꾸준히 타인과 타자를 인식한다. 돌멩이와 풀잎 하나까지도.

“나는 그대와 완전체다-나는 또한 그대의 한 단계고, 그대의 모든 단계이기도 하다.”

상호교류하는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지배적인 관계로써 섹슈얼리티에 길들여진 상상력은 명백한 한계를 보인다. 개인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인 휘트먼이 동성애자, 여성, 흑인 노예의 욕망을 평생에 걸쳐 자신의 시 속에 녹여냈다. 휘트먼이 추구한 ‘완전한’ 평등은 현실에서 가능한 꿈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몸의 차별과 몸을 향한 침투가 민주주의를 방해하고 개개인의 자유를 짓밟는다는 사실에 대해, 그렇기에 ‘몸의 흥분’을 노래하는 시인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적어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여성=몸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와도 연결된다. 구찌 가방을 주면 샤워하러 가는 여성의 모습(영화 <극한직업>)이 유머로 소비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지배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의 몸으로 향하는 길을 돈과 ‘물뽕’으로 다져놓은 길 위에 몸의 흥분은 없다. 몸의 지배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