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능력과 운 / 이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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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천만 영화로 불리게 된 <극한직업>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평등주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이다. 이 영화의 플롯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면서 전개된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우연성은 영화의 완성도를 훼손하는 것이겠지만, 역설적으로 이 요소 덕분에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삶이 우연성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특정인의 성공은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운의 문제로 판명 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이는 운이 좋아서 성공하는 것이고 어떤 이는 운이 나빠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창 비트코인이 이목을 집중시킬 때, “5천만 원이 있어도 흙수저고 없어도 흙수저”라는 말과 이런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영화 극한직업 스틸(사진=CJ ENM)

<극한직업>의 주인공들은 무엇인가 의도하고 실행하는 순간 번번이 실패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일들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둔다. 상황이 이렇다면 무엇인가를 의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의도하더라도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냉소주의는 세상의 변화보다도 지금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의 뿌리이지만, 동시에 세상 모든 일이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절대적 평등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극한직업>은 <스카이캐슬>이 보여준 세계관과 반대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스카이캐슬>만 하더라도 능력은 노력의 문제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능력 달성을 위한 무한 경쟁이 드라마의 주요 구도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런 무한 경쟁에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런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한계에 부딪힌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누구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세상을 다시 만들겠다고 하고, 또 누구는 개천에서 용이 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도 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 모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천과 용이라는 수사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세상을 개천과 개천 아닌 곳으로 은연중에 분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극한직업>과 <스카이캐슬>은 이런 분리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는 문화 논리이다.

이 분리 자체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개천이라는 수사로 설명할 수 없는 실질적인 계급의 격차다. 이 격차는 엄연히 잘못된 사회구조의 결과이지만, 오늘날 만연한 논리는 노력하지 않은 개인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더 비극적으로 말한다면, 노력해도 안 되는 운 없는 개인의 문제라고 믿게 만든다. 노력하지 않는 개인이나 운 없는 개인이나 사실상 문제는 개인이다. 잘못된 결과는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다.

이런 논리에서 절대적인 범주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다. 소상공인 자영업자의 애환을 다루고 입시지옥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더라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겨진다. 이것을 ‘사회파’의 한계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현 상태의 유지만을 절대선의 규범으로 장착하고 있는 한, 결코 문제의 뿌리부터 뒤집는 발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할 수는 없다.

현 상태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 예를 들어, 파업하는 노동자들이나,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이나, 복종하지 않는 여성들 같은, 규범으로 매끄럽게 수렴할 수 없는 울퉁불퉁한 존재들은 위험하거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직 일탈을 허락한다면, 현 상태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하다. 비판하더라도 현 상태를 뒤흔드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만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 여부가 갈린다는 믿음은 너무도 손쉽게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운에 따라 성공 여부가 나뉜다는 믿음과 만난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의 가치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 회로를 벗어나기 위한 전망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결과가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라는 반전의 사고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