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밑 신암동 쪽방촌의 밤은 어색할 만큼 고요하다. 주택 재건축 단지로 지정되면서 건물주들은 주택을 매매했고, 쪽방에 살던 세입자들도 떠나갔다. 쪽방촌 건물마다 붉은 래커로 엑스(X) 표시와 공가(빈집)라고 적혔다.
고요 가운데, 건물 몇 채가 창백한 간판을 밝히고 있다. D 여관도 그중 하나다. D 여관은 설계도도 없이 지은 건물인양 허술하다. 삐뚤삐뚤 제멋대로 생긴 창문은 모두 단창이다. 현관문 옆에는 아궁이를 연상시키는 연탄보일러가 있다. 알루미늄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누렇게 변색된 천장 합성수지가 보인다. 그 아래로 시멘트로 마감한 통로가 있고, 통로를 따라 쪽방의 나무 문짝이 트여 있다. 3층에서 폐병을 앓는 한 세입자의 마른기침 소리가 온 건물에 크게 울린다.
D 여관 107호 세입자 곽상길(70, 가명) 씨는 20년 넘게 쪽방에서 살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쪽방은 삶의 모든 것이 됐다. 곽 씨의 키를 넘긴 곳에 자그마한 창문이 하나 달렸다. 주방은 따로 없다. 방 한 칸에 냉장고와 가스버너, 신발과 옷장이 놓였다.
곽 씨는 설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시리다. 쪽방에 묶여 사는 곽 씨는 갈 곳이 없다. 성서에서 봉제공장을 영업하며 사장님 소리 듣던 시절도 있었지만, 25년 전 교통사고 이후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 사고가 나기 직전, 가족이 노름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다. 빚 독촉에 쫓겨 부산으로 갔으나, 고향이 그리워 이곳 쪽방촌으로 다시 들어왔다. 거리에 명절을 맞아 들뜬 사람들이 다닐 걸 생각하면, 곽 씨는 이번에도 연휴 내내 소주나 진탕 먹고 곯아떨어져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번 설날, 곽 씨는 마음에 짐이 하나 더 생겼다. 이곳 쪽방촌이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면서, 조만간 다른 거처를 구해야 한다. 겨울철, 거동이 불편해 옮길 방을 알아볼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문 닫는 쪽방이 늘어났다. 그런데 D 여관은 오히려 세입자가 늘어났다. 멀리 가기 어려운 세입자들이 아직 남아 있는 D 여관으로 몰려든 것이다. 10명 남짓하던 D 여관 세입자는 14명이 됐다. 대구 동구청에 따르면, 현재 신암동 쪽방촌에 거주 중인 세입가구는 35세대다. 이들은 곽 씨처럼 기초생활보장수급자이거나, 저소득층이다.
곽 씨가 노령연금, 기초생활보장수급비 등 한 달에 지원받는 금액은 모두 합해 68만 원. 방세 17만 원, 담뱃값 15만 원, 아흔 살을 넘긴 어머니 병원비 5만 원, 핸드폰 요금 5만 원, 생수 1만 원, 본인 병원비 15만 원가량을 빼면 10만 원이 남는다. 반찬값 하기에도 부족한 돈이다. 병원비도, 담뱃값도, 무엇하나 줄이기 어렵다. 담배는 마음을 위한 약이다. 간 경화, 폐 기능 저하, 복수도 차올라 병원을 끊을 수도 없다.
다른 쪽방 세입자들처럼 당장 짐을 싸지는 않아도 된다. D 여관 주인이 민간개발업자와 소송 중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곽 씨도 알고 있다. 문제는 당장에 다른 쪽방을 알아보기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대중교통만으로 방을 둘러 보기에는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임대아파트는 꿈도 꾸지 않는다. 보증금으로 쓸 목돈은커녕, 빚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설날이면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가는 것 같아요. 식당도 문 닫고. 집도 언제 나가라고 할지 걱정이고. 이사 비용이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다른 방을 알아보겠는데, 마음 있다고 할 수는 없네요.” (곽 씨)
동구청에 따르면, 잔여세대 35세대 중 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20세대다. 나머지 15세대는 저소득층이다. 수급자 20세대 중 이사 계획이 있는 세대는 14세대. 나머지 6세대는 곽 씨처럼 이도 저도 여의치 않다. 이들은 이미 주거급여를 받아 월세를 내고 있기 때문에, 동구청이 별도로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이 없다.
동구청 관계자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 6세대가 방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기본적인 사회복지망은 있지만, 개별적으로 몸이 아프거나 구체적인 사정까지 다 알긴 어려운 상황”이라며 “임대주택 보증금 문제를 LH공사와 협조도 구해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세입자분들의 상황을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도근환 동구의원(더불어민주당, 신암동)은 “(업체 쪽에서) 재산권 행사를 하는 것이라 안타까워도 특별한 방법이 없다. 연세 많은 주민은 임대주택이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민철 쪽방상담소장은 “이주 통보를 받고 서둘러 이주한 사람들은 비교적 싼 곳을 찾아 이미 갔다. 지금은 주변에 싼 방이 없다. 임대주택 들어갈 보증금도 만들기 어렵고, 다른 곳을 알아보기도 어려운 세입자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며 “민간개발업자나 기관에서 최소한의 이사 비용이라도 지원된다면 사정이 더 나을 수 있다. 개발 계획 수립 단계에서 최저 주거기준 이하에 사는 세입자를 파악해 지원책을 세우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