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도 역행도 아니다. 반역이자 겁박이다. 박근혜 정권이 추진하는 일련의 기획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키워드 하나는 이간질, 분열책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조직-미조직노동자, 부모세대와 청년 간 갈등에다 예의 이념 가르기까지. 국민을 이리저리 찢어놓고 있다. 말 잘 듣는 선량한 국민으로 계몽, 육성하겠다는 것이고 반대하는 국민은 헌법 바깥의 존재로 밀어내겠다는 것이다. 일제가 독립군 토벌에 사용한 비민(匪民)분리정책 그대로다. 전체주의는 이렇게 부활하고 있다.
이미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작업을?차례로 진행한 바 있는 그녀는 토 다는 누구든 겁주는 수준을 넘어 아예 씨를 말리겠다는 인식을 거듭 확인시켜주었다. 사실 그런 조짐들은 이미 여러 차례 예고편을 노출해 새삼스레 호들갑 떨 일이 아닌지 모른다. 저들은 누가 뭐라든 돌이킬 것 같지 않다.
마치 현실과 화면 사이의 간극같다. 드라마 사극마다 새 세상을 꿈꾸는 역모며, 숙명처럼 새겨진 신분 전복을 향한 처절한 사투가 팽팽한 긴장과 갈등구조의 단골소재다. 천만을 훌쩍 넘긴 영화는 재벌가의 민낯을 다루고 독립을 향한 선조들의 피어린 투쟁을 그려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화면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숙명처럼 신분이 결정되고 ‘노오오력’해도 도무지 뭐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나라, 탈출을 꿈꾸는 청춘들의 절망에서 망국의 한을 안고 만주로 향하던 선조들이 왜 겹쳐지는 것일까. 이 마당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이 역사를 부정, 자학적으로 배운 탓이라는 김무성의 말은 악마의 조롱에 다름아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자신감은 저들의 몫이고 절망감은 늘 우리 차지일까? 콘크리트 지지율과 운동세력의 무력감, 매 사안마다 ‘처삼촌 묘 벌초하듯’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 종북의 덫에 허우적대며 민심을 대차게 대변하지 못하는 야권의 지리멸렬은 저들에게 자신감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언론환경이거나 기울어진 이념적 토양 탓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들에게 거칠 것이 없게 된 이 같은 배경은 참으로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자신감은 급기야 전 국민 대사기극 노동시장 구조개악과 역사 사유화 시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영구집권을 향한 기획의 종결판이다. 역사는 하지만 권력자의 뜻대로만 되 는게 아니며 과욕이 부른 참상이 어떠한지 기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말랑한 문화통치의 여력과 밑천은 갈수록 사라지고 본격적인 무단통치 외 다른 수단이 고갈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저들의 반역은 어쩌면 조급함의 발로 이상 이하도 아니다. 말썽 일으키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렇고 비로소 종말을 고하는 포스트 박정희 시대에 대한 이렇다 할만한 대책도 없다. 저들은 급한 것이다. 이 격동기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 면면히 흘러온 예의 자신감을 회복한다면 역사의 물줄기는 바뀔 수 있다.
경계해야 할 게 있다. 시대의 흐름을 정태적, 고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역동성을 빼고 우리 현대사를 설명할 수 없다. 그 밑바닥에 민중의 뜨거운 힘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보이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관성과 결별하는 것도 중요한 숙제 중 하나다.
사실은 체념과의 싸움이다.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이 과거를 발판으로 우리의 미래까지 여지없이 장악하고 통제하겠다는 노골적인 선포 앞에 그저 해보는 데까지 해본 데서야 되겠나.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 뒤, 더할 게 없나 찾아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폭발 직전의 민심은 분출구를 찾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믿을만한 세력이 없다고 보는게 정확할지 모른다. 누군가 나서 ‘제대로’ 싸울 태세를 보여준다면 환호하고 응원하고 기꺼이 그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누가 할 것인가? 마음먹은 사람부터 뭐라도 시작하는 거다. 그간의 무기력, 부족함 니 탓 내 탓 따질 여유도 겨를도 없다. 모두가 힘 모으는 10월 31일 대구경북 민중대회, 11월 14일 10만 민중총궐기가 바로 자신감을 얻고 새로운 희망을 여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 이후 노동개혁안 저지 총파업 열기로 바통이 이어지도록 뜨겁게 응원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