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미터에 달하는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농성 중인 두 명의 노동자의 등 뒤로 해가 거듭해서 지기를 오늘로써 425번이다. 그 높은 굴뚝에서 그들이 밤마다 내려다보았을 서울의 야경은 그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아마도 불빛 한 점 한 점이 또렷이 보였을 것이다. 그것은 야경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지 아래서 위를 볼 때는 불가능하다. 아래에서 위를 볼 때 보이는 것은 그동안 숨겨진 세상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굴뚝 위가 어째서 아래냐고 따지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허공이라는 심연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그 심연에 내던진 세상을 풍경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 강퍅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세상의 속내를 비추는 거울처럼 차고 명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네 번째 가진 교섭에서 파인텍 측은 “고용할 여력은 있지만 고용할 수 없다”는 진심을 털어놨고, “노조가 들어오면 애써 지켜온 품질 경쟁력이 삐걱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며 노동조합 자체를 사갈시했다. 파인텍의 모 회사 스타플렉스의 김세권 대표는 2차 교섭 전에 “굴뚝에 올라가면 영웅 되느냐”고 조롱까지 했다. 이런 언어들은 스타플렉스로 상징되는 우리나라 자본이 노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스타케미칼 당시 때부터 싸워온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파인텍이라는 울타리에 가둬놓겠다는 비겁한 인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다. 스타플렉스의 경영 상황이 어떻든 간에 사회적 갈등과 그로 인한 고통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까지 정치는 내내 뒷짐을 졌다. 과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동부의 중재나 근로감독이 있었는지, 또는 정치권력의 해당 담당자들이 관심이나 가졌는지 들어본 바가 없다. 스타플렉스와 파인텍의 소유주와 경영진이 발한 저 언어들은 비록 구체적 행위가 뒤따르지는 않았지만, 부당노동행위는 아닌가?
스타케미칼 당시 고공농성을 벌이던 차광호가 이제는 지상에서 단식농성을 벌이자 그제부터인가 굴뚝 위의 박준호와 홍기탁이 함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해가 425번이나 서산에 지는 동안 뼈와 가죽만 남았을 텐데, 그 몸으로 단식까지 시작했으니 그 절박함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뼈저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평상시에는 “형제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권력과 자본은 지금도 여전히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해서는 진정한 비밀결사적인 동맹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굴뚝 위의 두 노동자는 ‘시민’도 아니고 눈치 봐야 할 ‘국민’도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차광호가 예전에 고공농성을 해제하면서 타협안으로 파인텍을 선택했다 해도 그동안 제대로 일을 하지도 못할 상황으로 내몰았으니 명백한 약속 위반이다. 백번 양보해서 두 노동자가 ‘영웅이 되기 위해’ 굴뚝에 올라갔다손 치더라도 굴뚝에 올라가기 전까지 스타플렉스 소유주 김세권과 경영진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박준호와 홍기탁이 저 높고도 깊은 심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도 지상에서 사라져주길 바랄 것이다. “고용할 여력은 있지만 고용할 수 없다”는 파인텍 대표라는 사람의 말은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노동 혐오는 이렇게도 뿌리 깊다. 국가권력에게 노동자는 단지 충실한 국민이어야만 하고 자본에게 노동자는 이윤을 위한 원자재이어야 하지 사람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국가의 노예로서 그리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원자재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 사람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저렇게도 무례하다. 한편으로는 과연 저들에게 사람의 언어로 대화하고 교섭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은 사람의 언어를 가질 때 사람이 된다. 그리고 정치의 심층도 이 언어(로고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는 정치가 저 굴뚝에 올라가야 한다! 정치가 할 일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