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018년 연말 개봉작 2편의 다큐멘터리 풍경
작년, 2편의 독립다큐멘터리가 전국 2~30곳의 상영관에서 “개봉”했다. 1주일 먼저 개봉한 “어른이 되면”(감독 장혜영)과 뒤이어 개봉한 “버블 패밀리”(감독 마민지)는 각각 2017년과 2018년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수상한 작품이다. 물론 영화제에서 평가받는 작품과 대중적 흥행작은 동일하지 않다.
물론 100억대 예산을 쏟아붓고, 400~500만이 넘어야 본전치기를 할 수 있었다는 상업영화도 작년 연말에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송강호 주연에 “국민은 개돼지” 유행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의 신작 “마약왕”, “써니”와 “과속 스캔들”의 강형철 감독이 국민아이돌 ‘액소’의 도경수와 합작한 “스윙키즈”, 하정우와 두 번째 만난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우 감독의 “PMC 더 벙커”까지 모두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힘들거나 불투명한 상황이다.
100억대 투자와 스타배우, 흥행감독만 믿고 안일하게 기획하다 실패하는 건 자본주의 시장구조 내에서의 문제다. 이미 할리우드에서 반독점법으로 1950년대 말에 해체된 ‘투자-제작-상영’에 이르는 수직구조(영화제작투자사인 CJ와 극장체인인 CGV, 롯데엔터테인먼트와 롯데시네마 형태가 미국에선 1958년 이후 불가능하다)인 한국 영화시장의 자업자득일 뿐이다.
물론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가 흥행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명박근혜 시절 비록 정치사회적인 후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화를 포함한 예술계의 노력, 그에 대한 최소한의 지지로 유지되던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방파제가 완전히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 마이너한 장르의 흥행 부진이 아니라 최소한의 진입조차 불가능해져버린 시장의 마비 혹은 타락의 위기를 언급하자는 것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넷플릭스에서 투자하는 다큐멘터리는 극영화를 가뿐히 넘어서는 예산과 치밀한 프로듀싱으로 탄생한다. 해외 주요 다큐멘터리 영화제들은 상업적 수익을 전제로 다양한 투자와 배급의 장으로 작동한다. 심지어 사회비판적 다큐나 독립영화라도 국내외 공적자본이나 예술영화투자펀드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시장과 관객들은 독립영화와 다큐 제작자들을 만주벌판 독립운동가처럼 취급하기 일쑤다. 그렇게 멀티플렉스에서 선택받을 최소한의 기회도 부여받지 못하고, 사회운동단체와 밀접하게 결합해 공동체상영이 전국적으로 조직되는 기회도 (부정적인 의미로)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됐다.
#1. 징후적 불안에 대한 확증의 시간.
“공동정범”과 “피의 연대기”부터
“어른이 되면”과 “버블 패밀리”까지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계속된다
세세한 통계를 정리해 제시한 자료가 먼저 나와 있어 발췌해 소개해본다.
80여 편의 다큐가 2018년 주요 영화제에서 소개됐고, 그 중에서 26편이 극장에서 개봉할 기회를 얻었다. 독립영화나 다큐 전문배급사라 하더라도 빈약한 재원과 한정된 상영관에서 의무감으로 영화를 개봉할 순 없다. 즉, 어느 정도 ‘통빡’이 나와야 소셜펀딩과 공적재원을 모아서 배급사의 지원으로 감당 가능한 선에서 개봉기회를 얻는다. 개봉까지 2~3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고, ‘타이밍’을 놓쳐서 개봉을 포기하거나 형식적 절차를 거쳐 IPTV와 VOD로 직행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위의 통계는 그런 것들까지 대부분 포괄하는 내용이다.
물론 영화제와 독립/예술영화관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마이너’ 장르가 무조건적으로 옹호될 순 없다. 그러나 상업영화 구조에 비해 훨씬 가혹한 통로를 비집고 개봉에 이를 정도라면 그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받거나 시장성이 있다고 평가받았을 신뢰성이 몇 배는 더 높을진대 도대체 몇 명이나 봤길래 필자는 이렇게 죽는소리를 하는 것일까?
2018년 한국다큐멘터리 개봉작 중 최고 흥행은 세월호를 다룬 “그날, 바다”로 54만여 관객을 기록했다. 아마 열거된 국내 다큐 중에서 유일하게 수익을 낸 작품일 것이다. 2위는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4만여 관객을 기록했고, 3위는 종교 다큐인 “무문관”이 2만여 관객을 기록했다. 4위가 설에 개봉해 꽤 화제가 됐던 “B급 며느리”로 2만을 넘기지 못했다. 흔히 독립영화 흥행의 척도로 인식되는 1만 고지를 돌파한 작품은 년초에 개봉한 “공동정범”(전작인 “두 개의 문”은 7만여 관객을 기록했다.)과 “피의 연대기”, 2017년 흥행작 “택시운전사”에 힘입어 개봉했던 “5.18 힌츠페터 스토리” 단 3편이다.
시장이 작고 상영관도 많지 않고 홍보가 안 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자연히 나온다. 그러나 이미 10여 년 전부터 20여 편 전후의 다큐 개봉이 이뤄지고 있었고, 공동체 상영이 아니라 극장 개봉을 중심으로 영화 홍보와 배급이 진행되는 게 대세가 된 현실에서 나름대로 노하우도 축적되어 있고, 관객과의 대화, 온라인 홍보 기술이 활용되고 있는, 시쳇말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현재의 배급 노력은 결코 안일하거나 게으르지 않다. 문제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반조차 요원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동정범”은 용산 참사라는 사회적 기억(1월20일이면 10주년이 되는!)을 현재화해 기억을 반추하는 작품이지만, 전작 “두 개의 문”에 비해 1/7의 관객을 기록했을 뿐이다. 1만여 관객조차 배급사와 제작자, 그리고 작품 제작 취지에 동의하는 사회운동과 지지하는 시민들의 자원을 총동원해 얻어낸 것이라는 점은 이 이상 뭘 어떻게 더 할 수 있냐는 탄식으로 귀결됐다.
역시 1만 고지를 겨우 넘은 “피의 연대기”는 2017년 이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여성주의와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다. 흡입력 있는 구성과 소재로 주목받았으나. 시장에서 성과를 내는 데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뭘 해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나마 첫 주에 상영관 50~100곳이라도 뚫으려면 CGV의 예술영화전문 상영관인 “아트하우스” 개봉에 매달려야 하니 독립영화/다큐라도 결국 멀티플렉스의 수직계열 독과점구조에 종속된 형국이다.
작품을 잘 만들면 ‘기적’도 가끔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기적’에 의지해 눈높이가 높아지는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면 뜯어말려야 함이 당연하다. 아니면 판을 접어야 한다. 모두 상업영화로 갈 것 아니면 다 그만둬야 하나? 유튜버들이 그 자리를 메워줄 것인가? 정말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2. 다시, 독립영화/다큐와 ‘고객’이 아닌
‘관객’의 결합을 위한 길찾기
세계 어디에서나 독립영화/다큐를 만드는 이들은 넉넉하지 않다. 영화산업구조에 묶이기보다는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발언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적게 종속될수록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서구의 경우 공적 재원으로 공공적/교육적 작업을 지원하는 것이 활성화돼 있다. 지자체/민간재단 등의 제작지원도 다양한 경로로 펼쳐져 있다. 국내에서도 그런 흐름이 일정부분 있으나, 재원의 규모나 채널은 여전히 바늘귀에 가깝다.
사회비판적 작업을 지원하는데 인색하고 그런 작업이 사회 다양성을 고양하는데 이롭다는 합의의 경험이 미흡하고, 심지어 2-3년 전까지 ‘블랙리스트’가 2-3년 전까지 한국에서는 요원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마치 초국적 대기업들이 농업시장을 장악하고 다양한 종자들을 말살하고 자사의 종자만을 구매하도록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이런 구조는 결국 취약한 면역력으로 불안을 내재한다. 단기수익에만 매몰되어 제조업 구조조정과 투자에 인색하다 피박을 뒤집어쓸 판국인 한국경제전망과 거의 맞아떨어지는 나락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대책이 나올 수 있을까?
#3.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광장’ 씨뿌리기
독립영화인 복지제도, 시네마테크 혹은 독립/예술영화관 지원 활성화 등의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뭐든 하는 게 지금보다는 낫다. 그러나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기존 정규직이 기회의 공정성을 언급하며 막아서는 현실에서 독립영화/독립영화인들에게 특례로 비칠 위험이 있다면 아마 당분간은 시도하지 않는 게 그나마 없는 본전치기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아마 가장 사회적으로도 유익하고 독립영화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시도는 ▲지역별 공공상영관 설치 ▲지자체 및 학교현장 영화제작수업 활성화다.
“지역별 공공상영관”은 멀티플렉스와는 별개로 지역에서 교육/아동/노인/장애인/지역사 등 공익적 목적으로 상영하는 극장이다. 공적 재원을 투입하고, 운영은 영화 관련 실무자들이 담당하며 지역 미디어센터가 결합하면 수동적 관람 뿐 아니라 다양한 인문학 강좌와 풀뿌리 영상/영화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구는 3-4개 적정규모 상영관과 자료실, 교육실 등을 갖추고 경북은 포항/안동/구미/경주 등 거점지역에 2개 상영관 규모와 기타 준하는 시설을 중앙/지방정부 재원으로 설립하면 현재 민간이 담당하며 악전고투하는 다양한 실험을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지자체 및 학교현장 영화제작수업 활성화”는 독립/지역영화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기록과 문화복지 축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지자체가 자기 지역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하고 지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지원하고(상업적 홍보도 포함될 것이다) 영화전문인력들이 시민교육으로 영화제작 등을 교육한다면 청소년에게 교육적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복지기관과 도서관 등에서도 기회를 확대해 디지털 난민이라 불릴 지경인 노인세대에게도 자아실현과 소외 극복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아울러 위의 두 가지 투자지원이 연동되면 지역사회의 문화적 풍요로움과 문화소외계층 해소, 지역 내 일자리 창출 등의 효과가 창출될 것이며, ‘퍼주기’라는 논란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본다.
장애인이 직접 스스로 영화를 제작하고 극장에서 장애인들이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사회 구성원으로 자립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 공공상영관에서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영화를 보거나, 탁아서비스를 제공해 극장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영유아 부모들에게 문화생활을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인층은 향수를 되살릴 기획상영회나 실버상영관 서비스의 활성화로 문화생활 접근성을 대폭 향상할 수 있다. 극장과 복지 서비스가 결합하는 형태로 극장과 제도가 지원한다면 미래적 구조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4. 장밋빛 환상에서 다시 현실로 내려오다
다시 현실의 암울함으로 돌아와야 한다. 장애인의 사회적 자립을 할 말 다 하면서도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발랄하게 다룬 “어른이 되면”, 한국사회 저변에 뿌리내린 부동산 불패신화에 긴박된 한 가족의 이야기 “버블 패밀리”는 아직 지역의 1-2개 상영관에서 개봉 중이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소리소문없이 스러져갈 비극적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이 두 독립다큐가 땅에 묻히기 전에 뭐라도 해볼 수 있는 건 해봤으면 싶다. 세상이 망하길 기다리기보다는 좋게 바뀌길 기원하며 씨앗 하나 뿌리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믿는다면.
사족으로 광고 하나 던지고 달아나려 한다.
악전고투 중인 “어른이 되면”의 2019년 새해 첫 관객과의 대화가 1/6(일) 15:15,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상영 후 진행될 예정이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전국을 누비는 고행으로 소수의 관객을 만나는 장혜영 감독과 배급사 식구들에게 대구라는 지역이 기운을 불어넣었으면 불어넣었지 빼버리면 죄 짓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