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나 임신했어.” 너무 기다렸던 아이. 하지만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애써 기쁜 척했을 뿐이다. 덜컥 겁이 나고 뭔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다. 내가 정말 아빠가 된다고? 과연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까? 많이 두려웠다. 어디로 도망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임신 초기 유산의 위기, 눈물을 왈칵 쏟게 했던 쿵쾅거리는 심장박동 소리, 서로 자기 닮았다고 우겼던 꼬물꼬물 초음파 사진, 그렇게 수많은 웃음과 눈물을 줬던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 ‘아이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예쁘다’는 말이 실감났다. 모든 것이 처음인 엄마아빠는 모든 것이 어렵고 서툴렀다. 절대적인 수면 부족,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상황, 화장실을 마음 편히 갈 수도, 밥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경제적 문제, 체력적인 문제에 허덕여야 했고 항상 피곤하고 예민했다. 부쩍 늘어난 스트레스에 부부는 전에 없던 말다툼도 적지 않게 했다. 어느새 그 많은 어려움이 어떻게 지나간 지도 모르고 다 지나갔다. 극복하지 않았다. 그냥 살아갈 뿐이었다.
둘째는 또 느낌이 달랐다. 아내의 임신 문자를 받고는 아무 생각 없이 “축하해”라고 답장을 보냈다.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 누가 누구를 축하한다는 말인지. 참 어이없는 일이다. 그만큼 별생각 없이 임신과 출산기간을 보냈고 산부인과 가는 날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돈? 체력? 육아? 뭐 별거라고. 어떻게 되겠지 싶었다. 한 번 해봤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하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육아하면서 처음에는 진땀 뻘뻘 흘리며 했던 모든 일이 익숙해졌다. 목욕시킬 때 행여 감기라도 들까 온열기를 틀고, 물 온도를 몇 번이나 맞추면서 조심스레 손수건에 적셔 씻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애가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난리를 쳐도 속전속결 목욕인지 고문인지 모를 작업을 해치우게 됐다. 꼼지락거리는 통에 몇 번을 뗐다 붙였다 반복하며 갈기 어려웠던 기저귀도 대수롭지 않게 척척 한 번에 갈게 되었고, 쉬야 한번만 해도 엉덩이 짓무를까봐 바로 갈던 기저귀도 퉁퉁 불어 짜면 나올 정도가 되어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외출하는 것,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사소한 데 연연하지 않고 익숙해진다는 것에 자신만만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돌아보면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지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은 불과 얼마 전까지 해온 일이다. 가까운 곳으로 외출 잠깐 하려고 해도 기저귀, 물티슈, 여벌 옷, 간식, 물병까지 한 짐 가득이었는데 이제는 맨몸만 달랑 나가도 그만이다. 그렇게 외출 가방이 줄어드는 것처럼 육아에 대한 부담은 점점 줄어들었다. 더 이상 육아는 부담스럽지도 절박하지도 않은 일이 됐다. 물론 여전히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부모 노릇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책에서 본 것은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명언 같은 글일 뿐이고,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정보는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다. 사랑해라, 기다려라, 귀 기울여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라, 그 당연한 이야기를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처럼 머리가 새하얘졌다. 부모도 지치고 힘들고 슬프고 화나는 사람이었다. 아이에게 내 감정을 쏟아내고 나면 자책하고 스스로를 원망해도 그때뿐이었다. 부모자격도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누구의 아빠로 불리는 동안 정작 ‘내 삶’은 사라졌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아이 잠을 재우고, 아이를 바래다주고, 찾아야만 했다. 아이에게 끌려다니고 뒤치다꺼리하느라 한눈팔 새가 없었다. 아이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여행을 갔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기 위해 돈을 벌었다. 내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러다가 정작 내 인생은 아무것도 남을 것 같지 않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세상에 다시 나가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같은 기분일 것이다. 가끔 나 같은 아빠들도 더러 있을 것이고 말이다. 우리는 부모가 되는 법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 또 누가 대신해주지도 않는다. 책임과 희생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 상황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결국 ‘내 삶’이었다. 인정하기 싫었고 그 가치를 몰랐을 뿐이다. 아이와 함께했던 한순간, 한순간은 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아이는 커갈수록 부모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육아에 대한 부담은 줄어드는 만큼 허전함은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보호자’라 불리는 부모는 점점 ‘감시자’가 될 테고 말이다. 이제는 점점 잔소리가 늘고 혼내는 일이 많아졌다. 대신해주기만 하다가 아이가 직접 뭔가 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도 될 텐데, 다정하게 말해도 될 텐데 그게 참 어렵다. 여전히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은 요원하다.
하지만 9년 전 어느 날처럼 두렵지는 않다. 어느새 아이들과 격려와 응원, 위로와 칭찬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또 울기만 했던 아이가 잔소리해대고, 혼나기만 했던 녀석은 말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시끌벅적 외로울 틈도 없다. 그 아이들과 함께 나도 다시 성장할 차례다. 앞으로 아이 얘기는 조금씩 줄이려 한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어른이 아이에게도 좋은 아빠일 것이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육아에 대한 아빠의 육아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박석준의 육아父담 연재는 이번 편으로 끝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