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MBC는 <허드렛일에 폭언까지…”나는 머슴이었다”>라는 뉴스를 방영했다. 조선일보 사주일가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한 운전기사가 ‘갑질’을 당하다 부당하게 해고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뉴스에서 사람들을 가장 경악하게 한 것은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의 딸인 초등학생 어린이가 피해자에게 쏟아낸 폭언이었다. 21일 미디어오늘이 MBC 보도 내용 외에 ‘폭언’ 녹취록을 추가로 공개하자 대중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실제로 녹취록을 추가 공개한 이후 22일 네이버 급상승 검색어 1위를 ‘조선일보 손녀’라는 키워드가 차지했다.
녹취록은 어느 ‘갑질 사건’ 국면에서나 등장했던 것이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직원 물벼락 사건 때도 그랬고,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때도 그랬다. 문제는 이번 ‘조선일보 사주 일가의 갑질 사건’ 녹취록의 주인공이 10살 어린이라는데 있다.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서 MBC와 미디어오늘 내부에서도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디어오늘 편집자가 밝힌 대로, ‘방 전무 딸의 나이를 고려하더라도 우리 사회 엘리트 집단과 오너 일가가 고용 안정성이 취약한 사회적 약자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더 우세했기 때문에 녹취록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일 테다. 공익적인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 공개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녹취록을 공개해서 얻은 공익은 반절의 성취만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사실 폭언보다는 총수 일가의 전횡이 핵심이다. 회사 임원의 운전기사 인건비를 ‘디지틀조선일보’가 지급하면서 횡령 및 배임죄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또한 그렇게 채용한 운전기사에 대해 운전 외 집안 잡일이라는 부당한 업무지시가 있었고, 초등학생 딸의 불평 한마디에 피해자가 부당해고 됐다는 문제점도 있다. 하지만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여론의 분노는 ‘어린이의 도 넘는 폭언’에만 맞춰졌다. 한 노동자에게 채용부터 업무, 해고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주변화됐다. 당장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의 대국민 사과문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죄송하다’는 내용뿐인 것만 봐도 그렇다.
사건의 본질은 주변화되고, 10살 어린이 신상이 관심사로 떠오른 것도 문제다. 당장 ‘조선일보 손녀’를 포털사이트에 검색만 해도 연관 검색어로 ‘손녀 학교·손녀 신상·손녀 얼굴·손녀 초등학교’가 줄줄이 뜬다. 예견된 사태였다. 전 국민을 경악시킨 발언을 한 아이가 대체 누군지, 대체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지 대중이 궁금해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런 파급력까지 고려하고 보도해야 한다. 설사 사회 지도층의 특권 의식을 고발하기 위한 일이라고 해도,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언론의 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이 조선일보 사주일가의 자녀일지라도 예외는 없어야 한다.
녹취록 공개를 통해 대중의 시선을 모으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시선의 초점을 바른 방향으로 설정하는 데는 실패했다.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폭언’으로 쪼그라들었고, 이에 대한 여론의 질타는 주로 총수 일가의 전횡이 아니라 ‘집안 교육’에 쏟아졌다. 물론 묻힐 뻔한 사건에 대해 대중의 시선을 모아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 맞다. 그러나 대개 좋은 보도란 ‘이러한 일이 있었다’만 알리기보다는,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는가?’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심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번 조선일보 총수 일가 갑질 사건을 통해서 어떤 것을 남길 것인가. 이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이제 언론이 이 질문에 답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