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혐오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가운데 며칠 전 그나마 단비같이 반가운 소식 두 가지를 들었다.
먼저, 올해 전태일노동상 수상자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11월 13일 열리는 전태일 열사의 48주년 추도식에서 지난 13년 동안 “만국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치며 싸워온 이주노조가 제26회 전태일노동상을 받는다.
전태일 열사는 48년 전인 1970년, 노동자들이 처한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 싸우다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그의 투쟁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이후 노동운동이 성장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됐다. 그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 구현하는 것이 전태일노동상의 제정 취지라고 한다.
역대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이 땅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위한 지난한 투쟁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노조 설립도 부정당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노조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들부터 소위 민주화 이후에도 정리해고, 구조조정으로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까지. 특히, 이번 이주노조의 수상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나긴 투쟁의 여정에 국적과 인종이 다른 이주노동자도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함께하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라 그 의미가 한층 크다. 이 자리를 빌려 이주노조에게 축하를 보낸다.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에 독립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서 인권위는 정부가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하는 “불법체류”라는 용어를 쓰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인종차별철폐협약이 국내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관찰한 보고서에서 인권위는 정부의 언어 인권감수성 부족을 지적하면서 ‘미등록 체류 상태’이거나 ‘체류 기간 경과 상태’인 이주민들에게 ‘불법체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들을 “법적, 제도적인 보호에서 제외하여 인권침해에 취약한 집단으로 만들고,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가져”온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인권위 권고 사항은 국제인권기구와 해외 주요 매체들이 이미 따르고 있는 원칙이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1975년 유엔 결의안 채택 이후 ‘불법’이라는 용어 대신 ‘서류미비’(undocumented-한국에서는 ‘미등록’으로 번역)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등록 서류미비 이주민을 범죄자처럼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비범죄화 원칙을 천명해 왔다. 미국 연합통신(AP)의 경우 언론매체 중 가장 먼저 지난 2013년 ‘불법’이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쓰지 않는다는 규칙을 추가했고, 많은 언론이 이를 따르고 있다.
이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원칙이다.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법일 수 없다. 전 세계 이주민 권리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구호가 “불법인 사람은 없다(No human is illegal)”이다.
실제로 유효한 체류비자가 없다는 것은 형사법의 처벌 대상이 되는 범죄 행위가 아니다. 출입국법상의 행정처분 대상일 뿐이다. 미국도 유효한 비자 없이 미국에 체류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대법원판결에서 분명히 확인한 바 있다. 이민법 위반은 행정법규 위반이지 형사상 범죄 행위가 아니다.
범죄가 아님에도 서류미비 이주민에게 ‘불법’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는 것은 마치 이주민의 존재 자체가 불법인 것 같은 부정적인 인식과 혐오를 퍼트린다. 무엇보다도 일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는 단순한 호명 이상의 사회적 의미가 있다.
미국의 역사적인 예를 보면, 선주민을 ‘야만인’이라 부르고, 흑인을 ‘원숭이’ 또는 ‘유인원’이라고 비하한 것은 선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과 흑인을 인간이 아닌 노예주의 사유재산 취급했던 노예제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한 집단을 비하하는 용어로 칭하는 것은 이들이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 아니며, 그들에게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는 사회의 암묵적인 승인인 것이다.
특히, 권력을 가진 정부나 지도자가 이런 비하 표현을 썼을 때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그렇기에 트럼프가 이민자들을 ‘강간범’, ‘범죄자’ 심지어 ‘짐승’이라고 부르는 것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늘어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불법체류자’라는 용어는 이주민들의 기본 인권을 부정하고 이주민 전체가 반사회적인 범죄집단인 양 매도하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부정된 것은 이번에 전태일노동상을 받는 이주노조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주노동자들은 2005년 4월 24일 서울경기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이주노조를 결성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는 조합원 자격이 없다며 조합 설립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후 이주노조는 10년 동안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아노아르 후세인 초대 노조위원장을 포함한 노조 지도부들은 표적 단속과 강제 출국을 당했다. 2015년 6월 25일 대법원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도 노조 결성과 가입의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이주노조는 마침내 존재를 인정받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국경과 국적, 체류신분으로 나누어진 분리장벽을 허물기 위해 싸우는 이주노조는 역대 전태일노동상 수상자들처럼 한국의 노동현실을 바꾸려고 싸우는 ‘제2의 전태일’이다.
한국에 이주노동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30년이 지났다. 이주민 인구는 이미 200만 명이 넘었고, 2021년에는 300만 명에 다다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지난 30년간 곳곳에서 한국의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 사회 발전에 기여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노동권을 보장하라”라는 기본적인 요구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 특히, 현대판 노예제인 고용허가제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마음대로 직장을 바꾸지도 못하고 사업주에 묶여 있다. 이로 인한 신분의 불안정성 때문에 인간사냥 식의 폭력 단속에 다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지난여름 미얀마에서 온 노동자 딴저테이 씨의 죽음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8월 22일 김포의 한 건설현장 간이식당에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이 들이닥쳤다. 동료들과 식사 중이던 딴저테이 씨는 단속반을 피해 창문을 열고 도망가려다 8m 아래 지하로 떨어졌다. 현장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려는 그의 다리를 단속반원이 붙잡아 그는 중심을 잃고 머리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가 추락한 후 30분 동안 구조의 손길은 없었다. 그는 방치됐다. 17일간 뇌사상태에 빠져있던 27세 청년 딴저테이는 9월 8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타향에서 목숨을 잃은 이 청년이 무슨 큰 잘못을 했을까?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돈 벌려고 한국에 왔다가 서류미비자가 된 것이 목숨을 잃을만한 큰 죄인가?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기본적인 안전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을 지는 이가 아무도 없다. 지난 10년 동안 단속 과정에서 10명이 사망했는데, 단 한 명의 단속반원도 징계받지 않았다. 도리어 정부는 “불법체류 외국인이 국민 일자리를 잠식한다”며 강력한 단속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살인적인 단속을 계속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미국 경찰이 흑인을 총으로 사살해도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인종차별에 항의해 미국에서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벌어진 것처럼 이러다가는 한국에서 ‘이주민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벌어질 날이 오지 말란 법이 없다.
이주노동자들이 내국인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단속과 추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한다. 경제 위기의 장기화로 사람들의 분노와 불만을 돌리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하다.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이 아니라 구조조정, 정리해고, 공장 이전 등이다. 일자리를 앗아가는 이들은 자본과 사장들인데 화살은 엉뚱하게도 이주노동자를 향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48년 전 전태일처럼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