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으며 정치권에서 배신이라는 단어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했으면 국회가 다시 재의하고 표결에 부쳐 그 결과에 따르면 그만이다. 그런데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나올까. 배신이라니. 누가 배신자이고 누가 배신자가 아니란 말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의리, 우아하게 말해 정치적 도의를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고 유승민 원내대표고 간에 그 누가 노동자 민중을 배신하지 않았단 말인가. 제삼자의 처지에서 보면 두 사람 다 배신자일 뿐이다. “배신자여, 배신자여, 정치의 배신자여”란 탄식의 노래가 절로 나올 법하다. 양아치들에게 의리란 것이 없다. 많은 범죄영화가 보여주듯이 양아치들은 자기만 살기 위해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 원내대표 취임하던 날 여당인지 야당인지 잠시 우리를 헷갈리게 하였던 유승민 원내대표의 바닷물보다 깊은 속마음은 알 길 없으나 루이 14세 여왕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는 웃지 못할 연출을 했다.
세월호에 메르스에 인간의 생명에 저토록 무감할 수가 없고, 노동자 민중에게 수백 번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 반성해도 시원찮을 대통령에게 웬 사과란 말일까. 처음부터 예감했던 것 아닐까.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얼굴에서 우리가 읽은 것은 전교조 탄압, 통합진보당 해산 아니었던가. 이정희가 표독하게 쏘아붙인 그 얼굴과 목소리를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망각했을 리 없다. 아버지의 반공이데올로기가 그나마 순화된 종북좌파 이데올로기를 묵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제 할 일이 뭐가 남아있을까? 대선 때 받은 상처에 대해 복수하고 자기편이어야 할 원내대표에게마저 배신의 낙인을 찍은 대통령에게 남은 일은 국민이야 배 타다 빠져 죽든 메르스 바이러스에 걸려 죽든 말든 관계없는, 배신과 보복의 악순환뿐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환자인지 알 길은 없으나 그 덕에 정치는 완벽하게 실종되었다.
실종된 것은 주류정치만이 아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한국사회에는 대항정치가 거대한 태풍에 쓸려가 버렸다. 없다.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연합독재정치만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사이 노동자 민중의 삶은 거덜 나 버렸고, 경제부총리가 부득불 최저임금 인상 운운하며 변죽이나 울릴 정도로 이 동네 경제는 더블딥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리스가 유럽연합의 구조 조정안을 반대하며 국민투표안을 제시하고 미국의 금리인상 등으로 한 길 앞을 알 수 없는 자본주의가 위기로 요동치고 있지만, 이 동네는 4·16 세월호 재단 급습을 필두로 공안탄압에 시동을 걸었다. 현 정권의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 속에서 대항의 정치를 구축해야 할 정치적 주체들의 모습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다. 보이지는 않지만 시시각각 우리의 운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매트릭스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그대로 있지만,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대한 분노는 파업이 아니라 집회로 드러날 뿐이고, 정치세력화의 공중전 담론만 유포되고 있다. 목소리는 우렁차나 현장 투쟁을 위한 행동의 발길은 끊어진 철로처럼 정지해 있다. “무노동 무임금 노동자 탄압 총파업으로 맞서리라”는 파업가가 무색할 정도다.
초심과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배신의 정치 시대에 가장 두려운 것은 유승민의 배신도 대통령의 배신도 아니다. 노동자가 노동을 배신하는 것이야말로 양아치들의 배신이다. 노동조합의 투쟁을 조합주의로 매도할 일이 아니다. 무너진 현장에서 작은 투쟁이라도 축적해 나가야 한다. 거창하게 정치세력화니 변혁이니 내세울 일이 아니고 내세울 것도 사실은 없다.
반자본운동, 변혁운동 운운하며 노동을 배신한 적이 없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메르스 바이러스 공포로 삼성서울병원을 폐쇄할 일이 아니라 국가를 폐쇄해도 시원치 않을 저 ‘무능의 바이러스’, 노동자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바이러스에 대항할 정치적 주체는 현장 밑바닥에 있지 정치세력화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