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제한하는 사회는 ‘비이성적 사회’고, 그 전형의 하나는 “학대와 지배를 영속화하는 경향”이 있는 정부다. 정부를 포함한 모든 사회 주체는 늘 이성의 원리에 부합하는 행동을 해야 하며, 서로의 행위를 솔직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만일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는 정부와 인간이 억압과 구속의 의미를 갖는다면, 이는 개인의 자유와 정면으로 배치된다(윌리엄 고드윈, 264쪽).
“정부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비판과 불평을 야기할 수 있는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는 주제다. 인류의 진정한 관심은 끊임없는 변화와 영구적인 혁신을 추구하는 데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완강히 거부하는 속성을 지닌다.”(윌리엄 고드윈, 153쪽)
정부에 대한 고드윈의 시각은 다분히 비판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고드윈은 “정부가 사람들의 동의에 근거한다면 동의를 거부한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권력도 가질 수 없다”며 루소 이후 확립된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도 부정적 견해를 취하고 있다.
또한, 그는 법률은 물론 헌법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반감을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서는, 통치는 “정의와 진리에 대한 각 개인의 이해를 그 바탕에 두고 있는가” 여부이다. 만일 다른 방법으로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독재밖에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성의 측면에서 판단할 때 이 문제는 헌법의 존재 유무가 아니다.
“우리에게 헌법이 아닌 평등과 정의를 달라. 아무런 강요 없이 우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해와 지식의 성장에 보조를 맞춰 사회질서를 변혁시켜 나갈 수 있게 하라.”(윌리엄 고드윈, 159쪽)
고드윈은, 사회의 기능은 법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해석하는 데 있으며, 불변의 이성만이 참된 입법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윌리엄 고드윈, 160). 사회가 정의의 원리에 만족하고, 그것을 왜곡시키거나 가감하는 사태가 빚어지지 않는 한 법률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고드윈의 결론이다.
이처럼 고드윈은 자신 사상의 기초를 ‘도덕적 이성’에 바탕을 두고 인간과 사회의 진보를 믿고 있다. 그에게 있어 ‘가장 바람직한 사회’는 곧 이성적 도덕원리에 바탕을 둔 ‘자유사회’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하는 정치제도”인 민주주의마저도 그에게는 ‘하나의 도덕원리’로 인식된다. 정치는 윤리학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그는 주저(主著)《정치적 정의》에서 자신이 입증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정치적 정의》에서 입증하고자 하는 문제는 개인이 도덕적 주체로서 분별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점, 즉 자유롭고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판단에 의해 행동해야 하며, 어쩔 수 없는 비상사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개인이나 기관도 사적인 판단(private judgment)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윌리엄 고드윈, 150쪽.)
고드윈은 도덕적 주체로서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에 대한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그 신념은, “비상사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개인이나 기관도 사적인 판단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는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정부로 대표되는 국가권력과 개인의 관계다. 정부는 그 존재 목적을 원칙적으로 ‘사회질서와 안전 유지’에 두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강제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개인의 사적 판단 영역이 침해된다. 만일 자신의 ‘사적 판단 영역(즉, 권리)’를 침해받은 개인이 정부를 포함한 비이성적인 제도의 폐지나 개혁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고드윈의 사상을 ‘혁명, 개혁, 아나키즘’의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면, 혁명과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아니오!’, 개혁에 대해서는 ‘예!’ 견해를 보이고 있다.
먼저, 혁명에 대해 고드윈은, “혁명은 독재에 대한 공포심에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독재를 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평가한다. “혁명기야말로 자유를 가장 크게 억압하는 시기다”라고 하면서, “사상을 검열하고 그것을 징벌하려는 시도는 가장 혐오스러운 독재다. 하지만 이런 식의 시도가 혁명기에 특히 더 많이 이뤄진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가 혁명에 대해 이렇게 극도의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이유는, 정치란 “인간의 행복을 가급적 폭력을 예방하는 노력”이므로 혁명도 결국 하나의 ‘정치적 폭력’이기 때문이다.
만일 혁명에 의한 독재가 시행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드윈의 주장은 단호하다. “나는 내 나라를 침범한 독재자에 대해 무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로는 그의 침략행위를 중단하게 만들 수 없고, 독재 상황에서는 동포들이 지성적인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윌리엄 고드윈 199~201쪽.) 혁명이란 ‘독립적 개인의 도덕적 이성과 정의에 반하는 폭력’이므로 ‘자유사회’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고드윈의 결론이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는 달리 개혁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오, 개혁! 온건하고 유쾌한 힘이여! 그 이름이 거룩하지 못한 부정한 입술에 의해 오염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깃발이 선동가들의 손에서 펄럭이고, 살인자들에 의해 핏물에 홍건히 젖어 흉하게 변해버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윌리엄 고드윈, 202쪽)
고드윈은 개혁을 방해하는 모든 정치가를 비판한다. “인간의 위대한 대의를 방해하는 원수는 둘이다. 하나는 수구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혁신주의자들이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든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특권은 ‘각 개인이 가진 독립성’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독재다(윌리엄 고드윈, 203쪽).
개혁을 위해 고드윈이 채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제도의 개선이고, 다른 하나는, 계몽이다. 사회의 진보를 믿는 고드윈은, 사회 개혁을 바람직한 쪽으로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확대에 비례해 제도를 고쳐 나가는 것”이라며 제도의 개선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 또한, 고드윈은 비이성적인 제도라 할지라도 교육을 통한 개인의 계몽이 행해진다면, 제도의 개혁이 성취된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그의 믿음은 다음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유로운 교육을 받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사회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심어 주고, 사람들을 계도해 바른 길로 인도하면 모든 작업이 완수된다.”(윌리엄 고드윈, 205쪽) 개혁에 관한 그의 주장은 오로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힘과 계몽의 무한한 진보라는 믿음에 따르고 있다. 이 점에서 고드윈은 18세기의 사유에 접근해있다(장 프레포지에, 44쪽).
마지막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고드윈의 입장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는, 아나키즘을 두 가지 유형, 즉 “아나키 상태를 대개 폭력적인 양상을 띠는 무질서 상태”와 “정부 없이도 훌륭한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상태”로 나누어 이해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나 후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고드윈이 아나키즘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는, 혁명이 가지는 ‘폭력성’과 그로 인한 독재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고드윈은 아나키즘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키 상태로 인한 무질서와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독재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든 해악에도 불구하고 아나키 상태의 해악이 정부가 있는 사회의 해악보다 더 나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곤란하다. 개인의 안전도 아나키 상태보다는 독재 상태에서 더욱더 보장받기 어렵다. 왜냐하면 아나키 상태는 일시적이지만 독재 상태는 영구적이기 때문이다.”(윌리엄 고드윈, 268쪽)
그래서 그는 아나키즘을 전제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정치적 자유의 개념이 무엇인가, 다른 하나는, 아나키 사회의 종착점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는 아나키즘은 자칫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꿈꾸고 아나키사회를 건설하려고 할까? 고드윈은 그 이유를, “아나키 상태는 깊은 통찰력을 지닌 철학자가 상상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사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찾고 있다.
또한, 아나키 상태는 “지금까지 터무니없이 왜곡되어 온 참된 자유의 형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압제에 대한 증오심의 결과”이다(윌리엄 고드윈, 269쪽). 고드윈에게 있어 아나키 상태는 도덕적 이성을 가진 독립적 개인이 그 자신의 참된 자유가 왜곡되고, 독재자의 압제에 대한 증오심이 분출된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를 이해의 눈으로 바라보면 강제적인 법률 없이도 서로 집단사회를 구성하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며 종국적으로는 아나키즘에 대한 긍정적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윌리엄 고드윈, 270쪽).
위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고드윈이 꿈꾸는 ‘가장 바람직한 사회’는 ‘자유사회’인 동시에 ‘이성인이 집합된 사회’, 즉 ‘이성사회’다.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사랑의 정신만이 충만할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 드러나듯이 그 사회는 ‘도덕사회’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개인과 사회의 진보에 대한 절대적 신념을 지니고 있는 종교적 낙관주의자다. “모든 사람이 미덕과 선의 진보를 목격하게 될 것이고, 때로 희망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들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실패 자체를 진보에 필요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윌리엄 고드윈, 286쪽)라는 말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된 이성인으로서 개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인간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고, 행동을 통제하려는 잘못된 수단”을 사용하여 강압적인 통제를 가하는 정부(국가)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드윈은,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이성과 정의의 명분 외에 다른 명분을 내세워서는 사람들의 협력을 얻을 수 없다”며, “생각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 외에 다른 수단으로는 그들을 통치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국가 의회 및 지역 자치단체의 배심제도와 지역의회의 권한 남용 사례를 들어 만일 정부가 ‘비이성적 제도’로 기능한다면, 그 정부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윌리엄 고드윈, 279쪽).
“정부는 인류의 악을 종용하는 야만적인 제도다. (…) 정부를 완전히 해체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런 해악을 근절할 수 없다. 의식 있는 인류의 친구들이여, 정부가 해체된 행복한 시대를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자!”
<참고문헌>
•김은석,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우물이 있는 집, 2004.
•박홍규, 『자주·자유·자연’ 아나키즘 이야기』, 이학사, 2004년.
•윌리엄 고드윈(피터 마셜 엮음; 강미경 옮김), 『최초의 아나키스트』, 지식의 숲, 2006.
•장 프레포지에(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아나키즘의 역사』, 이룸, 2003.
•한기영, 『초기 사회운동의 이념』, 신서원, 1997.
•Anarcy Space, [아나키즘] 영국의 아나키스트 고드윈, http://anarchian.tistory.com/595
•http://cruel.org/econthought/profiles/wgodwin.html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godwin/pj2_toc.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