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자격이 주어지자 주저 없이 고향 대구에 돌아온 젊은 청년은 국가보안법, 노동 사건을 주로 맡았다. 고향 대구에서는 ‘시국 사건’을 맡으려는 변호사가 없어 부산의 변호사를 불러 재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기투합한 동료들과 법무법인을 만들고, 사건 변론에 뛰어들었다. 미군부대 망루에 올라간 사건, 전교조 해직 사건, 페놀 방류 사건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사건을 앞장서 맡았지만, 법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일본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서른셋, 동경대로 유학을 떠난 이 젊은 변호사는 동경재판소에서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고국에서는 누구도 나서지 않던 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 피해자들의 소송에 일본 변호사들은 적극적으로 변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재판의 방청권을 얻고자 줄지어 서 있는 일본 시민들을 봤다. 일본 우익으로부터 ‘왜 나라 망신을 시키느냐’고 욕을 먹으면서도 조선인 피해자 편에 선 이들을 보며 젊은 변호사는 부끄러움과 함께 큰 다짐을 한다. 유학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등을 20년 가까이 이끌고 있다. 그는 대한변호사협회가 수여하는 45회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한 최봉태(52) 변호사다.
1997년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그는 일제강점하 피해자 관련 소송에 온 힘을 쏟았다. 2004년 2월 한일협정 문서 정보공개 소송 승소, 2011년 8월 정부의 위안부 문제 방치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2012년 5월 일본 미쓰비시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 냈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은 1심, 2심에서 패소한 후 3심에서 승소하기까지 무려 12년이 걸렸다.
끈질긴 소송만이 그의 역할은 아니었다. 1997년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결성을 이끌었고, 2003년 대표도 역임했다. 2004년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구지부’를 결성하고, 초대 지부장을 지냈다. 2005년에는 국무총리 산하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군대 내 구타, 인격모독에 단식투쟁으로 맞선 관심사병
안지랑에서 태어나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그는 대구 토박이였다. 그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학력고사 시험 점수가 잘 나와 법대에 들어갔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대학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81년 대학에 들어갔는데, 대학생활을 못 하겠더라. 캠퍼스 곳곳에 경찰들이 있고, 분신하는 학생도 있고. 법은 정의라고 말하는데, 눈에 보이는 정의도 못 지키는데 법이 어떻게 정의를 지키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있는 편이 아니라 당시 데모에 참여하긴 했지만, 주도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지하써클에 들어가지도 않았고…1학년 들어가자마자 노동야학을 했다. 앞서서 투쟁하는 것은 잘하지 못했지만, 노동자들 가르치고 막걸리 마시고 시국 이야기 하는 것은 재미있었다. 대학생활은 재미가 없어 2학년 마치고 바로 군대로 갔다”
사법시험을 마치고 법무장교로 복무할 방법도 있었건만, 그는 일반 사병으로 입대한다. 앞장서서 투쟁을 선도하는 투사는 아니었지만, 군대라는 환경은 그에게 권력과 싸우는 힘을 길러줬다.
“경기도 포천 독립 중대까지 내려갔다. 구타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군에서 단식투쟁도 하고 구타 없애라고 총을 쏘기도 했다. 목숨을 나누는 전우라고 하면서 서로 두들겨 패는 게 말이 되느냐. 나라 지키러 왔지, 인격모독하고 맞으러 온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관심사병이 됐다. 그 덕에 부대 내 구타가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전역하면서 내 자식을 절대 군대 안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요즘 다시 문제가 되는데, 군인들이 저항해야 한다. 군인복무규율에도 부당한 명령은 거부하라고 나와 있다”
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군 문제 해결방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는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군대라는 게 전쟁 나면 필요하지, 지금은 현재만큼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징병연령을 만 55세 이상으로 하는 거다. 만 55세면 애들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명퇴할 나이다. 군에 가서 건강도 회복하고, 월급도 받으면서 일하고. 힘든 일은 누가 하느냐고? 직업군인으로 채우면 될 것 아닌가. 전투력이라는 것도 자발적으로 해야지, 하기 싫은 사람 억지로 부른다고 되느냐”
계속되는 노동사건 패소로 떠난 동경 유학
피해자 변론하는 일본 변호사 보고 가슴에 담은 짐
우여곡절 많은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그는 198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민주화 투쟁 일선에서 싸움을 주도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고시준비를 하게 됐다. 사회정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고향 대구로 내려와 변호사 일을 시작한다.
당시 대구도 민주노조가 생겨나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거셌다. 법을 무기로 탄압이 들어왔지만, 대구에서는 변호인을 구하기도 어려워 부산지역 변호사들이 사건을 맡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노동사건에 팔을 걷고 나섰다.
시국선언과 <전교조신문> 배포를 이유로 91년 해임된 교사 임성무, 서수녀 씨의 해임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맡아 93년 승소판결을 이끌어냈다. 사노맹 관련 사건, 시국 사건, 학생 사건, 노동 사건 등을 2년 동안 도맡았다.
“대학 다닐 때 부채가 있었다. 누구는 목숨을 잃고, 징역을 살기도 하는데 사회 정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노동법 사건을 하면 계속 지더라. 재임용 탈락을 해고로 보지 않은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기한 지나 고용이 정리된 것으로 판결했는데,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직장을 떠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고로 보지 않을 수가 있나. 우리 노동법제가 일본과 비슷하니까, 일본 판례를 인용할 수도 있겠다 싶어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이 동경 유학행이 인생의 중대한 변환점이 되리라고는 그때까지도 생각지 못했다. 동경재판소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적극적으로 변론에 나선 일본인 변호사의 모습은 그의 부끄러움과 소명을 끄집어냈다. 우리나라 문제임에도 아무도 나서는 한국인이 없었다.
“아마도 전생에 난 조선총독부 악덕 관료를 했던 것 같다. 속죄하라고. 일본 변호사가 하는 걸 보는데, 내가 안 할 수가 없잖아. 유학 다녀와서 정신대 피해자 관련 글을 <경북대신문>에 기고했다. 그 기고를 보고 당시 영남일보 기자와 이용수 할머니가 찾아왔다. 우리도 시민모임을 만들자고. 대학생들이 참여하고, 대구여성회가 도우면서 시민모임도 결성됐다”
독립운동가들에 비하면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어렵지 않단다. 일본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별 다섯 개 짜리 ‘반일’ 인사지만, 독립운동가들에 비하면 신변의 위협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인터넷 별명은 ‘독립군’이다.
“일본은 전범정부, 한국은 횡령정부
민중의 몫을 정부가 가로채서는 안 돼”
그는 일본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를 향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일본정부가 한일협정으로 배상이 끝났다고 주장하자,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요구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도 한일협정 문서를 전부 공개하고 있지 않다.
“한국 정부는 정신대, 원폭 피해자들을 내버려두고 있다. 일제 피해자들한테 줘야 할 위자료가 1억 원가량, 피해자가 103만 명이다. 이걸 다 하면 103조가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한테 돌아가야 한다. 65년 한일협정으로 인해 이 몫이 한국정부로 넘어갔다면 한국정부가 103조를, 그렇지 않다면 일본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이걸 내버리고 있는 일본이 전범정부라면 한국은 횡령정부다. 왜 민중들의 몫을 정부가 가로채느냐. 국가로서 기본이 안 되어 있다”
그는 ‘정의’와 ‘진실’ 앞에 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다. 최봉태 변호사는 열린우리당 창당 발기인으로까지 참여했지만, 참여정부가 부안 주민들의 반대에도 핵폐기장을 추진하자 참여정부 비판에 참여한다. 또, 2003년 일제 강점 피해자들과 함께 국적포기를 선언했다.
“진상규명법 제정을 요구해도 안 해. 문서 공개도 안 해줘. 정부가 도리어 피해자 권리구제에 방해하고 있더라. 이럴 것 같으면 대한민국 국민을 해서 뭐하겠느냐. 이 양반들은 국가가 없어서 당한 사람들인데. 제대로 된 국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저항이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가 마음대로 국적포기를 할 수도 없더라. 하지만 지금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동아시아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너나 잘하라는 소리 안 들으려면 베트남전쟁 참전 반성해야”
위자료 103조짜리 재단을 만드는 게 그의 현재 목표다. 그러고 난 다음 베트남 전쟁 피해자들을 만나 사죄하고, 한국정부를 상대로 피해 배상 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다. 그래서 1년간 베트남에서 지냈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 피해도 컸지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저지른 만행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하라는 일본 사법부 판단이 나왔다. 고노담화(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군과 군의 강제성을 인정한 담화)가 나온 이후 3년 안에 입법을 통해 배상하라고 했다. 전범기업들에게도 자발적으로 책임지고 배상하라고 했다. 그런데 자기네 사법부 판결을 안 따르더라. 일본 정부에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려면 우리부터 돌아봐야 한다. 세월호 진상규명하라니까 법도 제대로 못 만들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책임도지지 않는다. 자기들이 저지른 것도 안 하고 일본에게 하라고 하면 ‘너나 잘하라’는 소리만 듣는다”
저항과 민주주의, ‘대구정신’에 대한 애착
“시민의 힘으로 ‘연비 좋은 인생’ 만들자”
올해 9월이면 베트남전쟁 참전 50년을 맞는다. 최봉태 변호사는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잘못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애를 태웠다.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대구’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대구 정신’은 저항과 민주주의의 역사라며 국채보상운동, 228민주화운동, 10월항쟁, 지방분권운동을 그 상징으로 꼽았다. 대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대학 때문에 서울을 간 거지, 한 번도 대구를 떠날 마음을 안 먹었다. 대구는 자부심이 많은 곳이다. 일제 피해자 문제에 나선 것도 대구 정신 때문이다. 노동, 민족, 민주 다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10월항쟁에서도 보이듯 대구가 좌파의 본거지라고 할 만큼 평등의식이 강했다. 인혁당도 대구가 중심이었다. 박정희 정권 들어와서 워낙 혹독하게 당하다 보니까, 희석된 것이다. 전태일 씨도, 조영래 변호사도 대구 출신이다. 민중지향적인 인물이 얼마나 많은가. 내리막이 왔으니 다시 올라갈 때가 됐다”
오십이 넘었지만, 쉬지 않고 대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젊은 시절 노동사건 변호사로 일하던 모습이 고스란히 베여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대구시민헌법’ 제정 운동도 진행했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시민의 요구를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선거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국회의원,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 뽑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대구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치에 대해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주권자가 중요하지 심부름꾼 뽑는 결과에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다. 힘도 없는 국회의원 뽑아본들 우리 공동체가 얼마나 바뀌겠나. 시민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시장과 국회의원에 호통도 치고 감시도 하고. 우리가 공동체를 만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내가 꿈꾸는 대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최봉태 변호사. 그는 작년부터 청도에 작은 사찰을 하나 만들었다. 큰 건물을 지어 올린 게 아니라, 작은 흙집 하나 지었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게 마지막 꿈이라는 최봉태 변호사는 “연비 좋은 인생”을 모토로 삼았다.
“가장 큰 폭력은 가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의제는 전혀 굴러가지 않고 있다. 주권자들이 직접 나서서 헌법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주권자들이 만들겠다는 데 어느 놈들이 못 하게 막으면 되겠느냐. 우리나라는 인생의 연비가 안 좋은 것 같다. 대표적으로 이건희 씨만 봐도 그렇다. 부는 엄청나게 가졌지만, 형제끼리 재판하고 말년에는 얼마나 힘드나. 좀 적게 벌고, 권력과 명예도 적게 가지고도 행복하게 사는 연비 좋은 인생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