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잔인한 안도 / 박하경

11:46

호주의 한 동물원에서 겪었던 일이다. 드넓은 초원에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캥거루 서너 마리가 빙 둘러쌌다. 그들의 존재는 맹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야생에서 짐승을 맞닥뜨리는 인간은 너무도 나약하다. 동물원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케이지 안에 갇혀 있는 동물과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호주에서 그 동물원은 과연 이 곳이 동물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야생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3시간을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동물원 한 바퀴를 다 돌 수 없었다. 가시거리 안에 그 어떤 동물도 볼 수 없는 빈 목초지도 많았다. 케이지라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에서 동물이 돌아다녔고, 다른 종류의 동물끼리 어울려 있는 모습도 간혹 볼 수 있었다. 그곳은 결코 가공된 공간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김진태 의원이 국감장에 벵갈 고양이를 케이지에 넣은 채로 데리고 나오면서 정치권은 물론이고 시민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거세다. 김 의원은 최근 서울대공원 퓨마 사살 문제와 관련하여 ‘동물학대’ 문제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벵갈 고양이를 데리고 왔다고 해명했지만, 그 행위 자체가 ‘동물학대’라는 것을 김 의원은 인지하지 못했다. 정의당 지속가능한 생태에너지본부는 “작은 동물은 스트레스에 더 취약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것’이라 괜찮다는 인식이었으며,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면 극도로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영역 동물의 생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동물학대 논란을 빚은 김진태 의원이 벵갈 고양이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김진태 SNS)

이처럼 지난 대전오월드 퓨마 ‘뽀롱이’ 사살 사태를 계기로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퓨마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많았지만, 김진태 의원 같이 여전히 동물을 우리 안에 가두거나 일종의 인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것에 대하여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퓨마 사살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은,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말처럼 사람의 목숨은 동물의 목숨보다 무겁다. 이는 비록 동물과 함께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이라는 종족’이 만든 사회에서는 당연한 전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살인하는 것과 동물을 살육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전제가 동물의 목숨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되어주진 못한다. 인간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생명에도 목숨의 무게가 있다. 대전오월드 측은 탈출한 퓨마에게 마취 총을 싸 쓰러뜨린 뒤 포획할 예정이었지만 마취제가 몸에 스며들기 전에 퓨마가 달아났고 그 이후 다시 동물원 안에서 맞닥뜨린 퓨마를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바로 사살했다고 밝혔다. 첫 번째, 두 번째로 발견되었을 때 퓨마는 여전히 동물원 안에 있었다. 과연 이들이 퓨마를 두 번째로 발견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엽총밖에 없었을까? 어떤 수단으로도 도저히 생포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인간을 해칠 가능성이 극에 달했을 때 ‘최후의 방도’로 사살을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김진태 의원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만약 동물학대 문제를 보다 생생하게 상기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국감장에 데리고 와야 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고양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충분히 고민한’ 방식이어야 했다.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적어도 이러한 노력과 고민이 들어간 것이어야 한다.

동물원도 마찬가지다. 문명의 발달로 야생을 접할 수 없어졌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현장을 체험해보고 싶은 인간의 욕망 때문에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경험한 호주의 동물원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최소한 이 지구라는 공간을 함께 점유하고 있는 생물체에 대한 ‘예의’다. 호주의 동물원에서 내가 새삼 느낀 것은 공포였지만, 동시에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기도 했다. 한국의 동물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탐닉된 귀여움 혹은 신기함.

탈출할 수 없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호랑이나 사자, 퓨마 같은 맹수들은 제아무리 맹수일지라도 인간에게 공포감을 줄 수 없다. 갇혀 있는 맹수들을 보며 ‘무섭다’라고 연신 내뱉는 것은 사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인간이 그들을 향해 내뱉는 조롱이 아닐까. 그것은 ‘네가 아무리 무서워봤자…’라는 우월함의 확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퓨마의 죽음이 같은 종의 인간의 안전을 지켰다는 안도감으로 소비되는 것에 분노한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잔인한 우월감을 확인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