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준의 육아父담] ‘출산주도성장’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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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아동수당을 신청했다. 담당공무원은 실적이 쫓긴 탓인지 몇 번이나 연락하며 신청에 편의를 봐주겠다고 했다. 대리인 지정과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고자 아내와 함께 아동수당을 신청하러 읍사무소에 들렀다. 내용이 뭔지도, 몇 개인지도 모를 정보공개에 동의하고 몇몇 사인을 해서 서류를 제출했다.

고작 상위 10%, 1080억을 안 주기 위한 대단한 과정이다. 이 비용이 올해만 1600억이 든다고 한다. 대박! 당연히 매년 이 돈이 또 들어간다. 막대한 행정력과 비용의 낭비, 부모의 재산과 소득에 관한 개인정보를 다 까서라도 굳이 10%는 걸러내야 속이 풀린다. 과연 기간 내에 집행할 수는 있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동수당 10만 원을 전체에게 지급하는 것을 반대한 이들이 ‘출산주도성장’을 부르짖었던 자유한국당이다. 아이 키우는 집에 통 크게 1억을 쏘자는 사람들이라면 겨우(?) 월 10만 원 아동수당 정도는 쿨하게 줘야 하는 것 아닌가.

▲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유성호 기자]

그렇다. 얼마 전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야심차게 ‘출산주도성장’을 역설했다. 아이를 낳으면 이천만 원을 주고, 아이가 클 때까지 월 33만 원을 주자고 한다. 와우, 이게 웬 횡재냐. 잘하면 우리 집도 큰 혜택을 보겠다 싶었다. 셋째를 낳을까? 순간 고민했지만, 애를 키워보니 체력과 돈, 이 두 가지는 필수다. 일단 체력 때문에 더는 안 되겠다.

이전에 없던 파격적인 제안. 그런데 생각보다 여론이 좋지 않다. 여기저기서 비판이 쏟아진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아이 낳으라고 돈을 팍팍 주겠다는 데 반대를 하니 말이다. 혹시 ‘주도’나 ‘성장’ 같은 그들이 존경해마지않는 박정희 때나 썼던 낡은 단어를 뺐으면 어땠을까? 그냥 무난하게 ‘저출산종합대책’ 같은 것 정도로 말이다. 굳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의 문제를 현 정권의 ‘소득주도성장’에 반대하고 대체해서 주장할 필요가 있을까? 일단 적게 일하고, 소득이 높아져야 아이를 키울 여력이 조금이라도 될 것 아닌가.

이것도 참 아이러니다. 아니면 복지와 평등과는 거리가 먼 ‘자유한국당’이 아닌 다른 이가 주장했으면 또 어땠을까? 아동수당처럼 ‘맞춤형 보육’이라며 어린이집 지원도 차별화하고, 무상급식도 마냥 공짜밥은 안 된다고 했던 그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무상’과 ‘보편’이 붙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 팔 걷어붙이고 반대를 외치던 ‘편가르기의 달인’들은 항상 부자편을 들면서 이럴 때는 꼭 부자는 빼야 한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이 아닌 다른 정치세력이었다면 여론이 이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별수 없다. 쓰는 말이 철학을 나타내고, 역사가 곧 정체성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돈만 준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상상은 자유지만 현실을 1도 모르는 착각이다. 출산과 육아는 극한의 고통과 인내를 동반한다. 물론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이 상당하기에 버틸 수도 있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의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수 여성들의 사회활동, 직장생활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법에서 보장한 출산휴가, 육아휴직조차 못쓰거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이다.

배려를 받기는커녕 괜히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내돌리거나 내쫓기거나 둘 중 하나. 어린이집에 맡긴 아이를 늦게 찾으러 가는 길은 왜 이리 더딜까.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동동거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아이를 키우며 인간다운 삶을 기대할 수도 없다. 어디 맡길 곳도, 놀릴 곳도 마땅치 않다.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도, 밥 한 번 제대로 먹는 것도 언제 그런 호강을 누릴 수 있을까 까마득하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 육아는 그야말로 전투다.

‘전투육아’가 끝나고 나면 ‘교육전쟁’이 기다린다. 아이가 제법 크면 만만치 않은 교육비가 든다. 점점 아이들은 경쟁에 내몰리고 부모는 더 경쟁한다. 마지못해 학원비라도 벌어볼 마음으로 취업 시장에 나가면 ‘경력단절’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대학도, 전공도, 소싯적 뭘 했든 간에 그건 별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저임금, 단순노동에 불과하다. 뭘 하나 하려면 필요한 자격증은 왜 그리 많고, 돈과 시간은 또 얼마나 드는지.

그래 봐야 최고임금은 최저임금이다. 그렇게 십수 년 전투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엄마라 불리는 여성의 삶은 어디 있을까? 그렇게 키워진 아이는 또 행복할까? 이제는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희생하고 싶지 않다. 아이를 그렇게 키울 자신도 없다. 그렇다고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요즘 사람은 자기밖에 모른다고 꼰대들이 지적질을 하니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꼰대들은 ‘출산주도성장’을 주장하며 ‘세금중독적폐’ 타도를 외쳤다. 공무원 예산을 줄여 출산지원금을 주자고 했다. 여기에 또 결정적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공무원 출산율이 일반국민의 2배 이상이다. 공무원 도시 세종시의 합계출산율이 전국 광역단체를 1위다. 이 지표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출산과 육아의 문제의 실타래를 조금이라도 풀려면 제도와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공무원들은 출산휴가, 육아휴직이 보장되고, 복직해서도 차별을 받지 않는다. ‘자녀돌봄휴가’라 해서 아이에게 행사가 있거나 상담이 있으면 쓸 수도 있다. 올해 7월부터는 만 5세 이하를 자녀를 둔 남녀공무원 모두 24개월 동안 하루 2시간 단축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시는 야근해도 맡길 데가 있다 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공무원 출산율의 대단한 비밀은 의외로 쉽게 풀리지 않는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무원처럼 살게 해주면 된다.

요즘 흔히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한다. 출산과 육아, 교육에 있어 공동체의 역할과 필요성을 말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국가와 정부라는 가장 크고 책임이 막중한 공동체는 무엇을 했는가? 방향은 고사하고 무엇을 도와주고 무슨 역할을 했는지 곰곰이 따져보자. 아이를 낳으라고 떠밀 것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가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주면 된다. 아이는, 사람은 절대로 국가 성장의 도구가 아니다. 각자가 목적이자 주인공이다. 사회와 같이 성장하는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