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있는 주말, 오랜만에 서울 광화문 광장에 나갔다. 정확히는 광화문이 아니라 역사문화박물관 앞, ‘성폭력 성차별 끝장 집회’가 열리는 장소다. 전광판 차량에는 큼지막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과연 그랬다. 안희정 무죄 판결이 보여준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저 문장이다. 국가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보지 않음을 법의 이름으로 (재차) 선언하였다. 놀라운 것은, 혹은 놀랍지도 않은 것은, 평소 진보를 자임하던 사람 중에도 이 판결을 옹호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단 점이다. “난 페미니즘 지지하지만, 현행법이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법치국가니까 사법부 판결 존중해야지.” 법원, 즉 조병구 판사가 ‘법대로’ 공정하게 판결했다는 것이다.
판결이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100쪽이 넘는 판결문을 다 읽은 성폭력 전문가들과 법률가들이 수차례 논증했다. 여기서 쟁점을 하나하나 재론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핵심만 추려두자. 판사 조병구 씨의 말인즉, ‘위력이 존재했으되 위력이 행사되었음이 증명되지 않아 무죄’라고 한다. 형법 303조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이 성립하지 않는단 것이다. 말은 된다. ‘위력’을 상완이두근에 잠재된 물리력, 즉 ‘알통의 힘’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위력은 그런 게 아니다. 1998년 대법원은 위력을 이렇게 규정했다. “위력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므로 폭행·협박뿐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대법원의 정의는 위력이 폭력과 동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명석하지는 않다. 저것만으로는 폭력과 위력의 상관성을 알기 어렵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근본적으로 위력은 폭력에 기초한다. 위력이 원숙해질수록 폭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위력이 약해지거나 원활히 작동하지 않을 때 폭력은 다시 고개를 쳐든다. 요컨대 위력이란, 폭력에서 태어났으나 폭력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살다가 최후에 다시 폭력으로 돌아가는 짐승이다.
위력의 정수는 ‘동의’를 만들어내고, ‘거부’를 침묵으로 바꾸는 데 있다. 비대칭적 관계일 때, 특히 고용-피고용 관계, 계약상 갑-을 관계일 때, 우위에 선 자는 노골적으로 의도를 표명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할 수 있다. 반면 열위에 선 자는 일자리를 잃는 등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된다. 거절할 경우 왕따를 당하거나, 계약이 파기되거나, 심지어 업계에서 퇴출되는 등 심각한 보복이 돌아올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회식 메뉴 선정에서부터 노조 탄압과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위력은 모든 일상에 편재한다. 가만히 있어도 자석 주변의 쇠붙이가 그쪽으로 끌려들어가듯이, 위력은 존재하는 순간 작용하기 시작한다.
미국이나 유럽에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연애 및 성관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개인의 자유를 극히 중시하는 이들 사회에서 저런 규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그 사회 성원들이 권력관계 속에서 ‘동의’라는 것이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더라도 안희정 무죄 판결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평소 비서 김지은 씨는 목욕할 때도 비닐봉지에 휴대전화를 넣어 들어갔을 정도로, 사실상 봉건 시대 ‘몸종’과 다름없는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일했다. 그는 안 씨가 지시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이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비서 김지은 씨는 성관계에 동의를 표한 적이 없다. 심지어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안희정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해 성관계를 요구했다. 이것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한 위력 행사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를 외치며 서울 중심을 행진한 2만여 시위대의 다수는 여성이었지만, 남성도 적지 않았다. 10대부터 60~70대까지 참가자의 세대도 폭넓었다. 이들은 아마 2016년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일 것이다. 함께 광화문을 돌아 행진하면서 ‘촛불’을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촛불’과 다르다. ‘촛불’은 엄밀히 말해,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아니었다. 체제의 금지를 위반한 건 박근혜와 최순실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쫓아내기 위해 일어선 시민은 ‘체제의 수호자’였고 촛불시위는 ‘정상성 회복운동’이었다. 촛불시민 다수는 자신이 ‘비(非) 국민’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이들을 “빨갱이” “프락치”라 낙인찍었다. ‘촛불’은 한국의 가장 강력한 주인 기표인 반공주의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촛불시민 다수는 ‘전복’이나 ‘해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법대로’와 ‘질서’를 요구했다.
그러나 2018년의 2만 시위대는 ‘법대로’를 말하지 않았다. ‘정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도 않았다. ‘법’이란 것이, ‘정상성’이란 것이, ‘국가’와 ‘체제’라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내 삶의 절박한 문제가 단지 대통령을 바꾸는 것으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체제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그 체제가 우리를 배제하고 적대할 때, “이게 법이니 가만히 있으라” 윽박지를 때, 과연 어찌해야 할까? 결국 우리는 헌법이나 국가 따위가 아니라, 각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린 지금, 촛불의 ‘양질전환(良質轉換)’을 목격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촛불에 내재했던 단독성(singularity)의 발현이다. 단독성은 보편적‧일반적 개념들로 환원될 수 없고 교환될 수도 없는 고유성을 뜻한다. 그 고유성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향한 투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해 겨울 모두를 감동시켰던 연설은 그래서 2년이 지난 지금 더욱 아프게 가슴에 박힌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면 제가 직면한 가정과 학교와 노동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제 삶의 문제가 박근혜, 최순실만의 책임, 잘못입니까? 제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박근혜, 최순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부모님, 반장들, 친구들, 선생님, 회사 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답게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진주촛불집회 19세 청년의 뭉클 자유발언’, 유튜브, 2016.12.01.)
한국 갤럽이 8월 21일~23일 동안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안희정 씨의 성폭력 무죄 선고가 ‘잘된 판결’이라는 응답은 26%, ‘잘못된 판결’이라는 답은 45%였다. 40대 남성의 46%, 50대 남성의 47%가 잘못된 판결이라 답해, 40대‧50대 여성의 응답(57%, 42%)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 댓글은 판결에 우호적이지만, 실제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가 로두스다. ‘함께’ 뛰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