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 루카 복음 10장 37절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이가 누구냐는 예수의 질문에 율법 교사는 사랑을 베푼 사람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예수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고 말한다. 율법 교사는 이후 그렇게 했을까.
지난 8일 오전 9시, 루카 복음 10장 37절이 적힌 비석 앞에 파업 중인 대구가톨릭대병원 노조(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대구가톨릭대학교의료원분회) 조합원 500여 명이 모였다. 대구시 중구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문 앞이다. 대가대병원을 운영하는 학교 법인 선목학원 이사장은 조환길(타대오) 대구대교구 대주교다.
노동자들은 핑크색 파업복에 모자, 선글라스, 토시, 마스크, 손풍기 등 갖가지 폭염 대비 용품을 갖추고 앉았다. 교구 정문은 오전 5시부터 개방한다는 안내문을 버젓이 걸어놓고 굳게 닫혔다. 가끔 지나는 주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신부, 수녀 어디있나. 예수님이 보고있다”, “서품서원 다진 맹세, 직원에게 베풀어라” 등의 가톨릭 정신을 요구하는 구호가 돋보인다.
마르코는 집안 대대로 가톨릭 신자다. 어릴 때부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듣고 자랐다. 그는 대가대병원에서 오래 일해온 영상의학과 전문 기사다.
그는 신입 시절 다른 병원으로 옮길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옮기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이 병원에 남고 싶었다. 왜 옮기지 않았느냐고 나무라는 이들도 많았다. 20여 년 전에는 노동조합도 있었다. 노조 창립일이라고 시계를 맞췄던 기억도 있다.
토요일 오전에 뭐하냐고 전화 온 친구에게 비아냥을 들은 게 벌써 10년 전이다. 친구는 “가톨릭 참 대단하다”는 말로 비아냥거렸다. 병원은 평일 한 시간씩을 빼서 토요 근무를 시행했다. 주5일제가 법적으로 시행된 후부터 다른 병원 친구들은 주말에 쉬거나, 근무하면 주말 수당을 받았다.
마르코는 “남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주5일제지만, 우린 아직 못 하고 있다. 친구들이 그런 얘기를 한지가 벌써 10년 전부터”라며 “가톨릭 병원은 역시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신자로서 더 힘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 파업에서 중요한 요구사항 중 하나가 주5일제 시행이다. 병원은 내년 3월부터 주5일제 근무를 하겠다고 밝혔지만, 임금 인상안이 합의되면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마르코는 “가톨릭 병원이기 때문에 다른 병원과 다른 점은 성모상이 더 많다는 점이다. 가톨릭 신자 할인 혜택도 있고, 봉사도 많이 다닌다”며 “하지만 하느님 사업을 하는 느낌이 안 든다. 그리스도 향기가 없다. 다른 병원처럼 똑같이 이윤 추구하고, 불법하고, 말 안 들으면 내친다. 하느님 말씀에 불법하라는 말은 없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SNS를 통해 병원 실태가 알려진 뒤,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에서 병원이 지난 3년 동안 28억 원이 넘는 법정 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게 확인됐고, 간호조무사 불법파견도 드러났다. 마르코가 읽은 성경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아니었다.
평소 존경하던 성당 신부가 병원 보직을 맡아 병원에 왔을 때, 마르코는 체념하게 됐다고 한다. 성당에서 본 신부는 사랑 가득한 성직자였지만, 병원에서는 그저 관리자였다. 송명희 분회장도 병원에 입사한 후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송명희 분회장도 가톨릭 신자다. 세례명은 레지나, 대학 시절 직접 성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미사 시간에 듣는 성경 말씀이 좋아서 성당을 자주 찾았다.
송 분회장도 “병원에서 본 신부님과 수녀님은 성당에서 봤던 모습이 아니었다. 수녀님이 소리 지르고, 막말하는 모습에 놀랐다”며 “(병원 다닌 후로) 성당에 나가면 쉬는 날 못 쉬기도 하고, 병원에서 워낙 가톨릭 행사에 불려다니니까 점점 성당에 가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마르코는 “병원에 오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건가 생각했다. 관리자로서 이익을 남겨야 하고, 주교님 뜻도 맞춰야 하고, 작년 이익만큼은 해야 인정받고, 못 하면 좌천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저 스스로 합리화했다”며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시스템 문제인 거 같다. 어느 신부님이 와도 똑같다”고 말했다.
닫힌 교구 정문을 바라보며 발언을 하던 송 분회장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송 분회장은 “병원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갈등이 생겼다. 그 원인은 병원 관리자인 수녀, 신부들이었다”며 “조환길 대주교가 말하는 가톨릭 정신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난해 병원 의료수익은 2,752억 원이었다. 지역 3개 사립대학병원 중 두 번째로 많은 수치였다. 하지만 법인 전출금은 250억 원으로 3개 대학 병원 중 의료수익 대비 가장 많았고, 간호사 평균 임금은 가장 적었다. (관련기사=대가대병원, 대구 사립대 병원 중 전출금 가장 많고 임금 제일 낮아(‘18.8.2)
병원은 지난 8일 기본급 5.5% 인상과 특별상여금을 기본급화해서 월 55,000원을 더해주겠다고 밝혔다. 병원 경영상황에서 최대한 노력한 수치로 추가 인상안은 받을 수 없고, 이를 수용할 경우 나머지 요구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못 박았다. 노조가 요구한 기본급 20% 인상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노조는 정액 55,000원 인상은 기존 특별상여금을 기본급화한 것으로 실질 임금 인상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노조는 기본급 20%를 인상했을 때, 7년 차 간호사 기본급이 160여만 원으로 최저임금보다 3만 원 정도 많은 수준이라고 맞서고 있다.
마르코는 병원의 임금 산정 방식이 순서부터 틀렸다고 지적했다. 가톨릭 병원으로서 교구나 법인에 전출금을 보내는 건 당연하지만, 병원 노동자들부터 챙기는 것이 순서라는 거다.
마르코는 “200억을 (법인에) 다 주고 나머지 돈으로 하려니 당연히 돈이 없다. 전출금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렇게 많은지는 처음 알았다”며 “순서를 바꿔야 한다. 우리부터 챙겨야 한다. 지금 노조에서 주장하는 기본급 20% 올려도 다른 병원과 비슷할 정도다”고 말했다.
파업 20일째인 13일 오전, 노동자들은 다시 교구청 앞을 찾았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는 루카 복음 앞에 노동자들은 “조환길, 너도 가서 제발 그렇게 좀 하여라”고 적었다. 노조는 이날부터 대구대교구를 상대로 파업 사태 해결을 요구할 예정이다. 조환길 대주교가 교구 산하 병원 노동자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