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메갈리아의 탄생과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페미니즘 리부트’ 바람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조개 줍는 소리’로 치부되던 페미니즘 담론 자체에 수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됐고, 페미니즘을 취급하는 수많은 상품이 각종 매대를 메우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며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나타났으며, 이번 6·13 선거 때는 페미니스트를 슬로건으로 내거는 여성 정치인이 등장하기도 했다.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페미니스트임을 표방하는 남성들도 생겨났다.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한 TV 속 대통령은 물론, 나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내게 여성혐오는 일베나 하는 거라는 둥 우리 사회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둥 나아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는 둥 묻지도 않은 얘기를 서슴없이 건넨다. 그러나 어째선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에 발 벗고 나서는 이는 결국 여성 혐오의 당사자들뿐이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여성들이 불법 촬영 규탄시위를 벌였다. 화장실 몰카와 리벤지 포르노 등 불법 촬영 영상 공유로 이익을 얻는 웹하드 업체와 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정부와 입법·사법부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당위성을 따질 것도 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시위가 ‘혜화역’에서 ‘광화문’으로 번지기까지, 내가 보고 만난 남성 중 그 누구도 그 어떤 목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물론 해당 시위를 다룬 기사에 남성들의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같이 해당 시위와 참가 여성들, 그리고 페미니즘을 ‘향한 조롱과 멸시였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그 많던 남성들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어쩌면 영리한 것일 수도 있다. 몇 마디 시혜적인 선언으로 그들은 일베가 아니고, 페미니즘을 옹호하며, 나아가 페미니스트를 표방하는 ‘정상적인’ 남성으로 취급된다. 이 ‘정상적인’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전히 여성 착취와 혐오를 일삼고 있음을 자인하지 않는다. 여성 혐오자가 아니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남성의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조롱과 멸시가 횡행하는 남성 호모 소셜리티는 모르는 체하지만, 여성의 페미니즘 운동 내용과 방식에 간섭하는 건 꺼리지 않는다.
그들이 위선적인 표피를 입은 채 주류의 입장에 편승하는 동안 여성들의 일상은 더 마비돼 간다. 모두가 페미니즘을 말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성들은 왕자가 필요없다)’ 티셔츠가, ‘Girls can do anything(여성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폰케이스가, ‘Girls generation(여성시대)’을 내세우는 여초 사이트가 먹고 사는 데 치명타를 날리는 세상에 산다. 누구든 베스트셀러를 읽는 건 자유지만, 젊은 걸그룹 멤버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 때아닌 논란이 인다. 목소리를 냈다 하면 ‘여자 일베’나 ‘페미나치(페미+나치)’, ‘메퇘지(메갈리아+멧돼지)’와 같은 낙인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미투’의 이면에는 여전히 ‘꽃뱀’이 자리하고 있으며 ‘미퍼스트(Me First)’라던 남성들은 필요할 때 침묵을, 불필요할 때 맨스플레인을 선사한다.
최근 한 공영방송 프로그램은 ‘동일범죄 동일처벌’ ‘낙태죄 폐지’ 등 주요 페미니즘 관련 문구가 적힌 화이트보드를 모자이크 처리해 전파에 실었다. 논란이 되자 제작진 측은 ‘페미 억압’이 아닌 ‘공정성’을 위한 조치였다고 입장을 밝혔다. 페미니즘이 유행하면서 여성들이 갖게 된 건, ‘공정성’ 등의 명목 아래 쉽게 지워질 수 있는, 말뿐인 권리다. ‘정상적인’ 남성들이 등장하면서 여성들이 마주한 건, 몇 마디 발화로 여성들의 삶을 직면하려는 시도조차 게을리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여성들을 향한 억압과 폭력을 확대하는 또 다른 주범들이다.
폭염보다 뜨거운 여성들의 절박함 앞에서 “벗은 사람도 처벌하자”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예쁜 애들은 저런 데 안 간다”라는 남성들을 본다. 언제까지 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모른 척 방치하고 동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