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마석(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이라는 동네가 있다. 1960년대 국가는 여느 농촌마을처럼 조용했던 마석에 한센인을 집단 이주시켰다. 이들은 마석에 자리 잡고 황무지 같은 산비탈을 개간하고 소규모 공장이나 가내 수공업으로 삶을 영위한다. 1990년대 산업기술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마석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된다. 이들은 어렵고, 힘들고, 더럽다고 여기는 일을 도맡아 정착하기 시작했다.
마석의 첫인상은 화려함이었다. 마석 입구는 빛나는 조명을 받고 있는 화려한 가구 전시장이 도로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다. 가구전시장 길 초입에 작은 카페가 있고, 그 카페 옆길을 따라 오르막을 올라가면 성공회 교회가 우뚝 서 있다. 이제부터 반듯한 도로는 없어졌다. 길은 콘크리트로 무늬만 만들어 놓은 듯한 비포장 길에 가깝다.
이 길에 진입하자 ‘SEKIYA(이새끼, 저새끼에서 따온)’라는 잡화점이 보인다. 그 잡화점을 시작으로 양옆에 작은 공장들이 이어진다. 한여름에도 커다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나무를 다듬는 노동자들이 연신 땀을 흘리고 있다. 조금 지나면 매캐한 가공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공장에서 마스크 하나 없이 일하는 노동자들을 만난다. 그 옆에는 가구 염색을 위한 도료를 분사하면서 온몸이 물들어 있는 노동자가 환한 미소로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고 있다.
공장을 지나면 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집들이 나타난다. 그 옛날 한센인들이 머물렀던 주택가이다. 이제 그 주택에는 외국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산다. 외양뿐 아니라 내부 구조물 역시 70년대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나마 이 주택에 거주하는 이들은 부자라고 했다.
노동자 대부분은 쪽방으로 이어진 공동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그 옛날 어느 공장 기숙사 시설처럼 보였다. 공동주택을 오르는 계단은 성인 2~3명만 올라가도 무너질 것 같은 부실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공동주택 옆으로는 깨진 유리와 녹슨 철근 덩어리,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행정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이 공동주택에 사는 이들도 형편이 나은 편이라 했다. 또 다른 노동자들은 공장 기숙사에 살고 있다고 했다. 한여름 햇살이 뜨거운 오후 2시에 방문한 어느 공장 기숙사의 공동 부엌과 공동 샤워실 내부는 깜깜했다. 고장이 아니라 원래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핸드폰 손전등을 켜자 수천 마리 바퀴벌레가 한 곳으로 물이 쏠리듯 빠르게 사라졌다. 샤워장 벽은 어두워서 검은 것이 아니었고, 검은 페인트로 칠한 것도 아니었고, 곰팡이었다.
이곳에서도 삶은 진행 중이었다. 가족들이 같이 이주해서 살고, 이곳에서 가정을 꾸려 살아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라 뛰어놀고 있었다. 몇십 년 전에 머물러 있는 외양과는 달리 삶은 진행형이었다. 아이들은 위험천만하고 아찔한 산비탈이나 공장 놀이터를 해맑게 뛰어 다니고 있었다. 불교, 이슬람교, 개신교, 가톨릭을 믿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나마 이 동네에서 가장 번듯한 성공회 교회 앞 농구장에서 국가별 농구대회를 치르고 있었다. 농구대회가 끝나면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 언제 무너져도 신기하지 않을 숙소로 돌아간다.
가끔 출입국관리사무소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는 등록, 미등록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인, 외국인 상관없이 서로를 지켜주고, 저항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대한민국 복지를 경험할 수 없다. 힘들기도 하거니와 요청하기도 어려운 영역이다.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는 시작부터 힘들었다. 노동자, 그것도 3D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구 백인이 아니었던 그들은 처음부터 하부계층으로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글로벌시대가 됐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시민의 친구가 될 수 없었다. 필요하면 오라고 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나가라고 하는 존재였다.
배가 부르고 등을 따숩게 해주면 행여나 이들이 한국에 영원히 머무르면서 한국인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복지의 자리가 머무르는 것을 경계한다. 불과 몇십 년 전 독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달러벌이’를 나섰던 한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그 나라들은 이곳 마석의 이주노동자보다는 더 배가 부르고 등을 따숩게 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삼촌이자 고모였던 한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소원은 ‘얼른 빨리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잘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소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노동자들의 방에는 고향 사진과 두고 온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이들은 차별과 혐오가 넘치는 대한민국에서 부자가 되어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고향행을 막는 것은 그러한 이기적인 바람이 아니다. 성희롱, 폭행, 저임금, 부당대우는 고용주와 마찰을 만들고, 사업장을 이탈하는 경우에 발목을 잡는 고용허가제와 체불임금, 빼앗긴 여권, 그리고 산업재해 사고로 인한 장애 등이었다.
비단 마석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유학생을 불법체류자로 오인해 폭행하기도 하고, 고용주는 여성 노동자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기도 한다. 식습관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에게 강제로 특정 음식을 먹이기도 하는 등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만 달라지고 양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정당하게 근무하고 정당하게 수익을 분배받아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우리보다 불쌍하고 가여운 존재일까?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도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았고, 이방인이었다. 우리가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사람보다 열등하거나 모자란 사람이기에 차별과 무시가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는 곳이 어디든, 어디에서 왔든 권리가 있다. 특히, 안전, 위생, 보건, 교육 등 기본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복지는 출신을 이유로 차별 시행되지 않아야 한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은 마석과 닮아 있다. 처음 만나는 화려하고 빛나는 대한민국 골목은 처리해야할 낡은 쓰레기들과 위험한 구조물이 구석구석 방치돼 있다. 마석의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