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는 매월 셋째 주 수요일에 연재합니다.]
추문과 구태로 얼룩졌던 지방선거가 오늘로 막을 내린다. 요란했지만, 결국 빈 수레였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애초에 선거제도, 혹은 대의제에 대한 회의와 의구를 불식할 수 없었지만, 이번 선거에서 기대했던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에 폭넓게 확산되고 있었던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이번 선거에서 중심 의제로 다뤄지기를 내심 기대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이슈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보다는 지역의 대표를 뽑는 지방선거에서 훨씬 집중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과정과 결과 모두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줄기차게 주창해온 녹색당을 비롯하여 정의당이나 노동당, 민중당 등의 후보들이 기본소득을 내걸고 선거에 임했고, 농촌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더불어민주당 일부 후보들이 ‘농민 기본소득’과 같은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기본소득은 이번 선거의 관심사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본소득을 추진하는 데 가장 선명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한 경기도지사 후보는 선거운동 내내 추문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일부 후보들은 기본소득 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비전조차 없이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 논의는 후보들의 정책 토론의 주요 의제로 전혀 부각되지 못했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실패? – 오보 혹은 가짜뉴스!
얼마 전, 핀란드는 지난 2년간 시행해 온 기본소득 실험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일부 매체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랏돈 풀어 기본소득 보장, 핀란드의 2년 실험 실패로”(조선일보), “핀란드 기본소득 포기…‘현금 쥐여주기 복지’의 실패”(동아일보),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중앙일보)와 같은 선정적인 문구로 기본소득 제도를 힐난했다. 이들은 기본소득 제도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며 핀란드의 실험이 마치 ‘실패’로 귀결된 것처럼 단정하여 보도했다.
하지만 이 같은 보도는 즉각 ‘오보’로 판명됐다. 한겨레가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의 설계와 시행을 담당했던 핀란드 사회보장국 국장을 인터뷰(한겨레 5월 5일자)한 내용에서, 올리 캉가스 국장은 핀란드 기본소득 실패에 관한 보도는 “가짜뉴스에 가깝다”고 일축했다. 이어 5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새로운 상상 2018’ 세미나에 참석한 캉가스 국장은, ‘기본소득 실패’ 보도에 대해 “내가 (기본소득) 실험을 담당했는데, 아직 결과 수치도 받아보지 못했다. 나보다 더 훌륭한 과학자들인 듯하다”(한겨레, 5월15일자)고 말하며 일부 매체의 무책임한 보도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2017년에 전 세계의 관심을 받으며 시작한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말 그대로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장기실업자 2천 명이라는 특정한 계층을 대상으로 2018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시작한 실험이었다. 2년이라는 시기를 한정하고 시작한 실험을, 기간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로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번 실험은 아직 올해 말까지 진행 중이고, 실험 결과에 대한 연구 및 분석은 2020년에야 나온다는 것이 핀란드 당국의 설명이다.
우리가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지점은, 이번 실험이 ‘보편적 기본소득’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핀란드는 이미 40여 가지가 넘는 각종 사회복지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전형적인 북유럽형 복지국가다. 그런데 현재의 핀란드 복지시스템은 50여년전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복지제도 모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선망해 온 북유럽형 복지제도가, 최근에 해당 국가들에서는 급변하는 사회구조와 노동시장의 변화에 역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낡은 시스템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기본소득 제도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적 인식 변화가 함께 맞물려 기본소득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복잡한 복지제도를 간소화하고 복지누수현상과 같은 기존 복지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행된 제한적 실험이었다. 그러하기에 이번 기본소득 실험 연장 포기는, 올리 캉가스 핀란드 사회복지국 국장의 말대로, 기본소득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에 의해 연장을 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편 독일의 경우 미카엘 밀러 베를린 시장이 제안한 연대적 기본소득제에 독일인의 61.8%가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타게스슈피겔 3월28일자) 밀러 시장은 독일의 실업급여에 해당하는 하르츠 피어(Harz Ⅳ)를, 연대적 기본소득제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연대적 기본소득제는 장기실업자들에게 일정한 기본소득을 주고 공익적 직업시장에 투입하자는 제안이다. 독일인 다수가 연대적 기본소득제에 찬성하는 것은 물론, 정당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고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때 독일 복지제도의 꽃이라고까지 불린 하르츠 피어는 앞으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기본소득제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복지사각지대와 기본소득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한 평범한 시민의 분노와 외침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 댄(다니엘 블레이크)은 평생을 솜씨 좋은 목수로 살아왔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질병수당을 받아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신세로 전락한다. 하지만 질병수당조차 복잡한 절차와 규정을 따라야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질병을 증명하기 위해 매번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하고 자격 대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담당자와의 통화를 위해 1시간 48분을 기다려야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매뉴얼만 반복하는 기계적인 목소리뿐이다. 복지관리국을 찾아 질병수당 탈락에 항의해 보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절차대로 진행하라는 싸늘한 응답이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그려진 영국 사회는 선별적 복지제도를 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선별적 복지는 복지 혜택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를 일컫는다. 국민 모두에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와 대별되는 개념으로 보면 된다. 선별적 복지제도는 복지혜택의 범위가 좁고 복지 서비스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복지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대상자들에게 충분한 혜택이 돌아가기 어렵다. 선별적 복지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선별하기 위한 복잡한 절차와 행정 비용이 필요하다. 복잡한 수급 조건, 부정수급, 복지의존과 같은 부작용이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다.
이러한 선별적 복지제도는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시스템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노동의 감소와 유연화로 인해 실직이 늘고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이 제도의 한계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일정한 자격심사에서 탈락하거나 배제되는 ‘복지사각지대’가 확대된다. 우리사회에서 생활고를 못 이겨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하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복지사각지대’, 즉 선별적 복지제도의 한계에서 기인한다. 물론 이는 선별적 복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전제로 이루어져 왔던 ‘복지제도’ 자체의 위기를 반영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선별적 복지제도는 자격심사의 기준 때문에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마땅히 지정받아야 하는 대상자들이 탈락하여 생활고를 겪어야 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복지 수혜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관계를 끊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변변찮은 노동소득이라도 생기게 되면 기존의 복지 지원이 끊기게 되어 자립적 삶이 더욱 위태로워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런 경우에는 일자리를 갖지 않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되는 것이다. 이른바 ‘복지의존’이라는 부작용은 나태한 개인의 본성이 아니라 제도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복지제도의 문제는 대상자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겨 주는 ‘낙인찍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복지 수혜자들은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지 않으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빈곤의 원인이 개인적 노력이나 의지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데도 이들에게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다. 이런 사회일수록 실직자나 복지수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다. 사회빈곤층에 대한 이러한 ‘낙인찍기’는 이들의 자립 가능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며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영속적으로 ‘빈곤의 덫’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복지제도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 제도는 자격심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의 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없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까다로운 절차나 기준에 의해 배제될 염려가 없다. 담당공무원들도 복지 대상자를 선별하거나 자격을 감시하는 데 행정력과 비용을 쏟아붓는 대신, 시민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원을 소신껏 펼칠 수 있다. 기본소득 제도 아래에서는 빈곤층이나 복지수혜자들이 사회적 ‘낙인’의 희생자가 될 이유가 없다. 가난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인간적 모멸과 굴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한 사회가 이룬 부(富)와 이로 인해 생기는 혜택은 그 사회 구성원 누구에게도 고르게 돌아가야 한다는 기본소득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경제적 삶의 안전망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자존을 지키는 인간다움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불평등 시대와 기본소득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그 어떤 근거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지만 가장 불평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해 소득분배와 불평등 문제를 연구하는 네트워크, ‘세계 부와 소득 데이터베이스’(WID.world)가 발표한 <세계 불평등 보고서>(2017)에 나온 통계에 따르면, 지난 37년간 상위 0.1%에 해당하는 700만 명의 부자가 가져간 세계의 부와 소득 증가분이 하위 50%인 38억 명에 돌아간 몫과 같았다. 또한 세계 상위 1%의 부유층이 조사기간(1980~2016) 동안 늘어난 부 중의 27%를 가져갔다고 한다.(관련칼럼: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불평등 현상은 세계적 현상이지만 우리나라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아니 예외라기보다는 세계 최악의 불평등 국가라고 불러야 마땅한 상황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2016년까지의 소득분배 지표>(월간 노동리뷰 2월호, 2018)에 따르면 2014년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비중은 48.7%로, 같은 해 미국(48.3%), 일본(42%), 영국(40%)보다 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더 높아져 49.19%를 기록했다. 상위 10%가 우리나라 전체 소득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상위 1%의 소득 집중도 14.4%로 미국(21.2%)보다는 낮았지만, 영국(12.8%), 일본(10.5%), 프랑스(8.6%)보다는 높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저소득 가구 하위 50%의 소득 비중은 중국보다도 낮아 세계적으로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고 한다.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2016년 기준 0.402를 기록, 유엔이 “사회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제시한 0.4를 넘어섰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에서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됐다.
이와 같은 불평등의 문제가 시간이 갈수록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심화되는 것은 기술의 급격한 진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 시대, 4차산업혁명 시대로 불리며 폭주하고 있는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격차와 불평등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기술혁신의 결과 ‘노동의 종말’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이로 인해 노동을 통한 부의 재분배는 점점 축소되고 있다. 인공지능이나 로봇과 같은 자동화기술이 대체해 나가는 일자리 감소는 노동자의 소득을 줄어들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된다. 기계가 대체하기 쉬운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부터 대량으로 양산된 중간노동이나 서비스 분야의 일자리까지 자동화의 물결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기술혁신으로 축적되는 막대한 부는 기술과 자본을 소유한 극소수에게 집중된다. 사람이 사라지는 기술의 시대에는, ‘낙수효과’라는 환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 댄이 질병수당 대상자에서 탈락한 후 복지관리국에 가서 항고 신청을 하려 하자, 담당 직원은 “인터넷으로 신청하세요. 디지털 시대잖아요!”라고 말한다. 댄은 자신이 평생 컴퓨터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으며 연필 세대라고 항변해 보지만, 절차와 규정의 준수만을 내세우는 비정한 복지국 관리의 태도에 이내 좌절하고 만다. 손으로는 뭐든지 능수능란하게 만들어내는 댄이지만, 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도 척척 해내지만 그에게 인터넷과 디지털은 불가능의 영역이다. 전 세계 절반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뒤집어 보면 전 세계 절반은 아직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다. 댄은 이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안의 세계에서 우리 밖의 세계로 내쫓겨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기본소득은 댄과 같이 기술과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제도다. 기본소득 논의 역사에서 지금처럼 인간의 노동이 위기에 처한 상황은 결코 없었다. 기술 발전과 기계의 자동화로, 생산성은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지만, 그에 반하여 노동의 역할은 감소하거나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적 삶의 조건도 위협받고 있다. 기본소득은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술혁신으로 만들어낸 막대한 부를 고르게 나누자는 아이디어다.
이러한 기본소득의 논리에는 인류가 축적한 부와 기술이 특정 계층이나 사람들이 독점해서는 안되는 공공재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사회가 보유한 부는 그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기여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 사회의 부는 그 사회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물질적 조건과 지적·문화적 자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기본소득은 한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를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고 인정하고 그 혜택을 모두에게 돌아가게 하려는 장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유재산인 사회적 부를 구성원들에게 환원한다는 측면에서 기본소득은 결코 ‘적선’으로 폄하되지 않으며 도리어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권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특히 최근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빅데이터,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디지털 기술은 대다수의 사용자가 만들어내는 정보와 콘텐츠를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과 같은 거대 글로벌 IT 기업은, 전 세계 수많은 대중들의 정보 집적과 참여 유도 없이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성장을 이루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말 그대로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나가야 할 세상의 가장 간명한 밑그림이다. 먼 훗날 이뤄야 하는 이상향이나 도그마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 나누어 볼 수 있는 실천이다.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고 최소한의 자유와 권리를 함께 누리고자 하는 아이디어다. 더 큰 파이를 탐하다 내 가족과 이웃을 굶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파이를 나눠 함께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물고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세상의 우려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아직도 나누어야 할 파이와 물고기가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