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원조 야도(野都) 경산의 트라우마, 보도연맹 사건

[경북민심번역기:뻘건맛] 경산편 #1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

20:52

6.13지방선거:경북민심번역기, 뉴스민은 경북 13개 도시와 광주를 다녀왔습니다. 이 가운데 경북 경산시는 우천으로 라이브방송과 취재를 중단한 곳입니다. 경산을 깊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오래도록 지역에서 ‘경산신문’을 만들고 있는 최승호 대표를 만나 경산이 보수적인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구가 전통적으로 야도였듯이 경산도 야도였습니다. 뭐 2·28, 10·1항쟁. 제헌의회 때 무소속이 경산에서 당선됐어요. 2대 국회의원 선거는 무소속 방만수가 당선됐습니다. 보도연맹 학살과 관련됐어요 빨치산 루트가 운문산에서 팔공산으로 연결되는데 그 인근 지점에 용성(면)이 있는데 용성 지역에 인민위원회 활동이라든지 다른 지역보다 더 활발했어요. 보도연맹 가입 대상자들이 많았죠. 방만수라는 사람이 용성지서장(인데) 보도연맹원 명부를 불태워버렸어요.”

“2대 대통령 선거 때 약 한 1,200표 정도를 조봉암 후보가 더 많이 받았어요. 3대 때는 조봉암 후보의 지지가 세 배 정도 더 높았죠. 일설에는 이승만이가 서울에서 기차 타고 부산 내려가면 경산 쪽을 안 보려고 다른 쪽을 보고 내려갔다고. 그런데 왜 보수적으로 변했냐. 이것은 철저한 탄압, 레드 콤플렉스, 후손들에 대한 연좌제, 진보적인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완전히 없애버립니다.”

“경산에서 1950년 7월 초에서 9월 초까지 보도연맹원 한 약 500명 정도가 학살됩니다. 코발트 광산에 약 한 3,500명이 학살됐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그때 당시에, 제가 직업을 보니까 농민들도 많았지만, 교사, 화이트칼라. 당시의 화이트칼라도 많았더라고요. 당시에 조금이라도 진보적 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면 대부분 다 죽임을 당했다는 거죠. 그런 진보세력이 살아남을 여유? 공간? 이런 게 전혀 없었어요. 어떤 피해 의식 때문에 오히려 더 보수당을, 여당을 지지하지 않았나. 민주당을 지지한다든지 이런 건 결국 뭐냐면 내가 코발트광산 학살과 연결돼 있다. 이런 것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얘기를 못 했죠.”

“제가 2000년대 들어와서 사실은 전국적으로 특히 경북지역에 진상조사를 다녔는데 그때까지도 어른들이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걸 두려워했어요. 왜냐면 혹시나 또 정권이 바뀌어서 잡혀갈까 싶어서 그런 뿌리들이 경산에서, 대구, 경북에서 보수당을 끊임없이 지지할 수밖에 없게 하는 (이유다) 살아남기 위해서.”

[경산=뉴스민 경북민심번역기 특별취재팀]
영상: 박중엽 기자, 김서현 공공저널리즘연구소 연구원
취재: 김규현 기자, 이상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