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에서 소가 사람을 들이받고 탈출했다. 충남 서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소는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운명을 거부하고 야산으로 탈출할 것을 선택했다. 우리가 흔히 알던, 죽기 직전 눈물만을 흘리는 다큐멘터리 속 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소는 개우(牛)적 영웅이지만, 그 이상은 되지 않으리라. ‘사람을 죽인 소’ 정도로 인간들 사이에서만 아주 잠깐 회자되고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언론을 타고 같은 운명에 처해진 소들에게 전해진다면, 그래서 소들이 연대할 용기를 얻는다면, 그건 혁명이 될 것이다.
여성들이 이제까지 강요받았던 피해자의 윤리를 거부했다. 학습을 강요받아온 피해자의 윤리란 대개 참고 기다리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화장실에 있는 구멍을 휴지로 틀어막고, 용변을 볼 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없나 습관적으로 옆 칸과 천장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노력 말이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몰카 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만이 답인 줄 알았다. 그러나 홍대몰카사건을 겪으며 공적인 개입이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단 것을 목격했다. 분노한 여성들은 기형적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선언했다. 지난 19일 혜화역에 여성들의 분노가 모였고, 시위참가자들은 “여자들도 마음 놓고 용변 보고 싶다”와 “동일범죄 동일수사”를 외쳤다.
1만 2,000명이 단일 논제로 모인,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시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얕았다. 5월 25일 기준, 네이버에서 지면뉴스 검색을 통해 ‘혜화역 시위’를 검색했을 때, 5월 19일 혜화역 시위와 관련된 기사는 10건이 나왔다. 그리고 단 3개만이 톱기사였다. 시위 이후 일주일 동안의 기사가 단 10건에 불과하다면, 평소 여성 관련 이슈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 외에는 시위 사실 자체를 모를 가능성이 높다. 반면 같은 방법으로 ‘홍대 몰카’를 검색했을 때, 홍대 누드 크로키 모델 몰카 사건과 관련된 기사는 47건이었으며, 그 중 톱기사는 11개였다. 몰카 범죄 피해자의 80% 이상은 여성이고, 개가 사람을 문 것은 늘 일어나는 일이기에 뉴스 가치가 작다. 남성이 몰카 범죄의 피해자가 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고, 따라서 사람이 개를 문 것은 뉴스 가치가 크다. 하지만 매번 있던 일이라는 이유로 문제를 방치한다면 변화는 없다.
혜화역 시위 외에도 늘 있던 일이라는 이유로 소홀히 다뤄지는 의제들이 있다. 스튜디오 사진회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섹스산업이 그 예다. 피해자 한 명의 고발로 시작된 이 이슈는 섹스산업의 문제로 확장되어 분석되고 비판되기는커녕, 그 피해자를 SNS로 응원한 여자 연예인의 ‘진심’ 여부에 더 방점이 찍혀 보도됐다. 이것도 일상적 일이기 때문인가? 한 대학커뮤니티에는 몰카 용의자가 1명인데도 불구하고 잡지 못했던 이야기가 올라왔고, 여성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폭력·희롱에 관한 자신의 경험들을 풀어냈다. 피해사례가 너무 많아서 뉴스 가치가 없는 것인가? 아니, 일상적 피해가 만연하다는 이유로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파헤치려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혹시 언론은 기울어진 권력 관계에 기대 반발 없이 편하게 기득권을 누려왔던 것은 아닌가?
언론의 역할은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의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혜화역 시위의 경우, 경찰 수사속도에 관한 논쟁점에만 집중하지 말고, 여성들의 분노 속에 담긴 기형적 사회구조에 대해 꾸준히 보도해줘야 한다. “여자들도 마음 놓고 용변 보고 싶다”와 같은, 너무 당연해서 기괴하게 느껴지는 시위 문구가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 알려줘야 한다. 몰카범죄에 대한 현재의 처벌수준이 합당한지 묻는 여론조사가 시행되고, 조사결과가 보도되어야 한다. 여성들의 분노를 성 대결로 프레임 짓지 말고, 여성이 소비의 대상이 되는 잘못된 사회문화를 바꾸자 앞장서 주장해야 한다.
혁명적 소들이 도축장으로부터의 탈주를 준비하고 있다. 탈주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좀 더 많은 이들이 연대해 탈주한다면, 그건 사회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자 변화의 씨앗이 된다. 그리고 탈주에 불을 지피는 것은 언론의 역할이다. 여성들이 연대하고 거리로 나가 ‘우리는 서로의 용기’라고 외친다. 그 ‘우리’ 속에 나를 포함시켜달라. 더는 무관심을 강요하지 말고, 공감과 연대의 선두에 서달라. 리베카 솔닛이 말했다. 무감각은 자아를 수축하고, 우리가 무감각한 사회의 일부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고. 그녀의 표현을 빌려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무엇이 뉴스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언론이 그들의 무감각함을 자각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