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시즌이 다가오면 경북 안동은 ‘문중 공천’이라는 말로 회자된다. 소위 ‘유서 깊은’ 양반 가문, 안동 권씨와 안동 김씨가 국회의원과 시장 자리를 두고 경쟁한다는 거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나선 안동 김씨 김광림 후보가 한나라당 허용범 후보를 꺾으면서 ‘문중 공천이 정당 공천보다 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당시 한나라당이 공천 파동 탓도 있지만, ‘문중 공천’의 위력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지난 15일 <뉴스민>이 6.13 지방선거 기획 ‘경북민심번역기’ 아홉 번째 방문지로 안동을 찾을 땐 경북 특유의 보수성뿐 아니라 ‘문중 공천’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도 추가로 더해졌다.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문중 공천’은 실재한다. 지방선거가 실시된 1995년부터 현재까지 국회의원, 시장 당선자 현황을 보면 1995년, 98년 지방선거를 제외하고 모두 안동 권씨와 김씨 당선자가 나왔다. 95, 98년 선거에서 시장 자리를 빼앗긴 후부턴 안동 권씨와 김씨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의심되는 기록도 있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안동 권씨(권정달, 권오을)가 국회의원 재임 중 치러진 3차례 지방선거(98년, 2002년, 2006년)에서 안동 권씨는 시장 후보로 나서지 않았다. 안동 김씨(김광림)가 국회의원을 하는 2008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는 반대로 안동 김씨 시장 후보가 나서지 않는다. 두 문중이 국회의원과 시장을 ‘나눠 먹기’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안동에서 만난 시민들도 안동 권씨와 김씨가 선출직 공직을 독식하는 현상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시민들은 현상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책임 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시민들은 현상을 ‘당연한’ 결과처럼 여기거나 ‘언론이 만든 프레임’으로 생각했다. 본인들이 지지자를 선택할 때 문중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공통적으로 나왔다.
경북민심번역기 아홉 번째 도시 안동
‘보수성’+‘문중 공천’의 실상은?
“안동 권-김 나눠먹기···안동시의 흐름”
“안동은 권씨랑 김씨가 국회의원, 시장 나눠 먹는다는 시각이 있잖아요?”
“왜냐하면, 안동 권씨, 김씨가 촌에 유권자 20%래.
그럼 사돈에 팔촌까지 하면 플러스가 많겠지?
그러다보니까 나오면 유리한 거지, 다른 성보다”“어르신도 권 씨?”
“나는 윤가래”
“그럼 (그런 현상을) 어떻게 보세요?”
“그렇다고 해서 안동 권씨만 된건 아니거든.
국회의원은 그래도 박씨도 했고, 오씨도 했고.
의성 김씨도 김씨 중에 다르잖아. 거(기)도 했고.
여긴 정치 분포가 그러니까, 권씨, 김씨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어”“어르신은 그게 문제가 있다거나,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은 안 하세요?”“안동시에 흐름인데, 뭐.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뭐 참. 이야기 안 되는 거지.
내가 만약 단상에 올라 그런 이야기 했다?
야단났겠다. 참. 으허허하하하”
안동구시장에서 건어물 점포를 운영하는 윤모(76, 남) 씨는 “흐름”이라는 말로 현상을 정리했다. 평생을 안동에서 살아온 윤 씨는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현상을 살폈다. 윤 씨는 인구 구성상 안동 권씨와 김씨가 많아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진단했다.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니냐는 물음에 윤 씨는 “그런 이야기 하면, 야단난다”면서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흐름’과 ‘야단난다’는 윤 씨의 표현 안에 모든 것이 담긴 듯했다.
안동찜닭 골목에서 50년째 찜닭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여성 A 씨나 60대 후반 김점순 씨의 말은 윤 씨가 살핀 현상을 뒷받침해줬다. 이들은 하나 같이 문중 후보라서 권씨나 김씨를 지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A 씨는 “안동 김씨, 권씨라고 다 찍는거 아니고 사람 됨됨이 보고 찍니더”라고 했고, 김점순 씨도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지”라고 ‘일꾼’을 강조했다.
“안동 권씨, 김씨라고 찍는거 아냐”
‘언론 탓’이라는 의견도, “언론이 그렇게 만든 것”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60대, 남) 씨는 문중 공천 이야기가 회자되는 걸 ‘언론 탓’으로 돌렸다. 김 씨는 “언론에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닌데”라고 주장했다. 스스로 보수라고 밝힌 김 씨는 언론에 대한 불신을 내재한 듯 보였다. 김 씨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이후 이어져 온 시국도 언론이 만든 것으로 인식했다.
“언론에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닌데”“안동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렇지. 사람 됨됨이라든가 능력을 따져서 하는 거지.
안동 김, 안동 권을 따지는 건 아니고, 전에도 김씨가 할 때 시장도 김씨 한 적 있고.
그건 괜히 언론에서 그렇게 만들어가는거야”“국정농단으로 경북 사람들이 실망을 많이 했지 않나? 그만큼 믿어줬었는데”
“믿어줬는데 그랬다는 게, 그것도 모든 게 언론 떄문이라”
“믿었다는 말 자체가 틀렸다는 거예요?”
“믿어가지고, 우리가 뭐 저거 한 게 아니고. 실제로 모든 상황 돌아가는 게,
우리 보수들이 생각하는 거랑 다르잖아. 반대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김 씨 말처럼 안동 김씨가 국회의원과 시장직을 모두 한 적이 있긴 하다. 김휘동 시장이 2006년에 당선한 후 2008년 김광림 국회의원이 당선해서 2년간 안동 김씨가 국회의원과 시장직을 모두 차지했다. 하지만 2010년부턴 다시 안동 권씨가 시장직을 맡았고, 김씨는 시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있다. 6.13 지방선거도 후보 4명 출마를 준비하고 있지만, 김씨 후보는 없다.
6.13 선거, 안동 시민 진심 알 수 있는 기회 될 듯
안동 권씨 후보 2명 출마,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오랜 민주당 지지자도 “민주당은 안 돼” 낙담
언론에서 만든 것이든, 인구 구성상 어쩔 수 없는 흐름이든, 안동 시민들은 입을 모아서 문중 후보여서 표를 주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6.13 지방선거는 안동 시민의 진심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다.
자유한국당은 3선 도전에 나선 권영세(65) 시장 대신 권기창(55) 안동대 부교수를 공천했다. 한국당 공천을 받지 못한 권 시장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두 후보 모두 안동 권씨인데다 각각 한국당 공천과 현직 시장이라는 이점을 안고 있어서 권씨 문중 지지만으로 당선하기 쉽지 않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나서는 이삼걸(52) 전 행정안전부 차관의 지지세도 만만찮다. 이 전 차관은 2014년 6회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나서 권 시장에 이어 40.4%를 득표한 바 있다. 안원효(67) 전 경북도의원도 무소속으로 나서면서 섣부르게 결과를 예단할 수 없게 됐다. 문중 공천, 정당 공천뿐 아니라 득표력 있는 후보 난립으로 시장 선거에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이삼걸 전 차관이 당선한다면 이 전 차관은 문중 공천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한국당 강세 경북에서 파란을 일으킨 사례가 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해온 강임석(67) 씨는 여전히 민주당이 안동에서 어렵다고 생각했다.
강 씨는 국정농단 사태 이후 안동도 조금은 바뀌었다면서도 “도지사 여론조사 보면 60%가 한국당 찍어준다고 하니까 잘못된 거지. 경상남북도는 안 바뀝니다. 안 바뀌어요”라고 확언했다. 심지어 강 씨는 경북에서 당선되는 민주당 공직자들은 경북으로 이주해온 전라도 사람들의 지지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전라도 사람이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강 씨 경남 의령 출신이라고 했다.
“안동은 민주당이 출마를 안 하지 않았나?”
“나와봐야 안 되요.
여긴 십몇 프로가 나오는 데, 이유가 맹, 전라도 사람이 여 와서 살아요.
평소 살면서 이야길 안 해요.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고. 선거 때만 되면 찍어요”“의성이나 경산에는 당선되는 사람 있는데, 꾸준히 나오면 안 될까?”
“거기는 프로테이지(퍼센티지)가 전라도 사람이 (많아요).
지금 선거 때만 되면 똘똘 뭉쳐서 민주당을 집중적으로 찍어줘요.
대구에서 되는 이유는 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많아서 찍어주니까.
이 지역 사람이 찍어줘서 되는 게 아니고”
관건은 얼마나 많은 시민이 투표장으로 나설 것인가가 될 공산이 높다. 안동 풍산읍에서 만난 40대 여성 황모 씨는 반(反)자유한국당 정서를 가졌지만, 선거 자체에 염증을 느꼈다. 황 씨는 “선거에 관심이 없어요. 할 놈이 없어요. 그놈이 그놈인데”라면서 “저는 경북 살면서 빨간옷 정당을 지지하지 않아요. 하신 게 없잖아요. 저는 그 정당을 참 지지하지 않는데, 전 당을 떠나서 사람을 본다”고 말했다.
황 씨는 “저나, 제가 아는 사람들은 (자유한국당)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요. 차라리 무소속으로 나오지. 근데 무소속 나오면 뭐해. 무소속으로 되고 난 다음에 빨간옷 입더라”라면서 실망감을 드러냈다. 황 씨는 이번에 민주당도 시장 후보가 나오더라는 말에 “출마하면 뭐하나. 빨간옷 입으면 다 된다는 생각을(하는데). 출마하는 분들도 그렇고, 투표하는 분들도 그렇고 웬만하면 빨간옷 입어야 당선이 되지”라고 큰 기대를 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