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전 당원 ‘드루킹’의 댓글 조작 사건에 ‘게이트’란 이름이 붙었다. ‘게이트’는 정부나 기타 정치 권력과 관련된 대형 비리를 일컫는 말이다. 국가정보원 댓글 공작 사건에서부터 대통령 탄핵과 구속으로까지 이어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그 대표다. 그렇다면 ‘드루킹’과 ‘게이트’는 양립할 수 있는 단어인가? ‘드루킹’은 특정 후보·정당 지지자일 뿐이었다. 정부나 기타 정치 권력과 결탁해 국민 예산을 사용하고 공무원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일삼으려 하지는 않았다.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은 ‘게이트’가 아니다. ‘드루킹 게이트’는 보수언론과 야당의 오랜 타성이 만들어낸 명명이자 프레임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은 왜 보수언론과 야당의 의도대로 ‘게이트’로 보도되는가? 왜 국회 정상화를 막는 ‘블랙홀’이자 현 정부와 여당, 나아가 우리 사회 진보가 책임을 뒤집어써야 할 문제로 설정되는가?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가 놓여온 위치, 그리고 진보 스스로가 내세워온 자기 검증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정치 사회에서 진보는 늘 약자의 위치에 놓여 왔다. 일제시대와 분단을 거쳐 독재에 이르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한 레드 콤플렉스는 독특한 정치 진영을 낳았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라는 이름은 특정한 이념을 가진 세력의 총칭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이해 중심적인 세력의 총칭으로 작동됐다. 그 결과 보수의 입장은 기득권을 포함한 우리 사회 다수에게 보다 쉽게 견지될 수 있었다. 그와 달리 거대 이론과 이상에 근거한 진보는 필연적으로 소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진보에게는 이론과 현실 사이 괴리를 줄이는 것, 즉 자기 담론의 정당성을 입증받는 것이 생존을 위해 관건이 됐다.
우리 사회 진보는 정치적 입지를 위한 자기 검증 수단으로 논리적 완결성과 도덕적 완결성을 담지했다. 문제는 진보가 내세우는 논리적 완결성과 도덕적 완결성이 되레 진보의 족쇄가 됐다는 점이다. 논리적 완결성에 대한 강박은 진보는 무능하다는 고정관념을 확산시켰다. 진보는 서로를 비판하고 계몽하려 들 뿐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지도, 그들의 이념과 대의를 실현할 방법을 사유하지도 않는다는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도덕적 완결성에 대한 강박은 진보로 하여금 맞는 말을 해도 ‘싸가지 없다’는 오명, 위선과 허영에 빠져있다는 오명을 쓰게 했다. 당위적으로 옳은 말과 이념만을 반복할 뿐 그들의 삶은 그들이 부정하는 보수 기득권층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냐는 반문을 사기도 했다.
논리적 완결성과 도덕적 완결성이라는 지킬 수도 이룰 수도 없는 화법을 내세우는 한, 진보는 현실 정치에서 보수의 하위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 말로는 ‘차별 반대’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차별을 일상화하는 진영보다, 언행일치를 전제로 차별을 은닉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 진영이 현실 정치에서 보다 득세하기 쉽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며 위악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업가가 미국의 정권을 잡은 것, 유럽에서 브렉시트 연쇄반응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 중도 정당들이 무너지고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는 것들은 현재 진보가 마주한 상황을 방증한다. 진보의 위기를 초래하는 발화점이 됐던 통합진보당 사태, 나아가 진보 전체가 ‘드루킹 게이트’로 매도된 이번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 진보의 윤리학은 새롭게 쓰여야 한다. 논리적 완결성 대신 정치적 유능함을, 도덕적 완결성 대신 현실적 대안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이 집권 중인 지금도 우리 사회 진보는 오랫동안 메여온 완결성의 족쇄 아래 정치 편향과 도덕 강박, 부정적 몸짓과 비판의 정치, 대화와 토론 그리고 논쟁을 가장한 자기 독백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진영 논리나 낡은 서클주의에 매몰되어 다른 정치 집단과 연대하는 방법을 잊고 있지 않은가? 6월 지방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됐지만 그해 총선에서 집권당이 보수야당에 패했던 때를 기억한다면, 진보는 이제라도 변화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