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극보수인데, 잘못 오셨다. 내가 봤을 때.”
“응. 우리는 보수라서, 젊은 사람치고는”
43살 동갑내기 여성 최 씨와 정 씨는 함께 경북 경주 대릉원 인근에서 공인중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한참을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다가, 홍준표 대표를 비판하던 두 친구는 갑자기 스스로 ‘보수’라며 커밍아웃했다.
두 친구는 공인중개업을 하면서 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에 반대하고, 스스로 보수정당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실업급여, 최저임금 인상 정책에 부정적이고, 남북 평화 체제 조성에도 의구심을 품었다. 이들의 말과 생각은 ‘보수적’인 사람의 전형성을 보였다. 그런데 젊은 보수 커밍아웃(?)을 한 이들은 뒤이은 물음에선 방향을 잃고 오락가락했다.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두 사람은 “스스로 보수는 아닌데요, 정치에 크게 관심 없는데”라거나 “관심 없어요. 우리, 별로”라고 오락가락하더니,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라고 겨우 알리바이를 찾았다. 최 씨는 “근로자만 잘 살고, 사업자는 다 망하고. 그런 세상이다. 지금”이라고 덧붙였고, “응, 그럼 우리도 회사에 취직시켜주던지!”라고 정 씨가 맞장구쳤다. 어쩐지 허무한 결론은 뒤이어 만난 다른 시민들의 말과 생각으로 보강됐다. 이들에게 보수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정치 세력 이거나 적어도 보수 세력이 집권할 때 먹고 살기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경북민심번역기’ 여덟 번째 방문지 경주
경북에서 진보정당 단체장 후보 가장 많이 출마
최초 선출직 공직자, 민주노동당 비례 시의원 배출···하지만,
지난 14일 <뉴스민> 6.13 지방선거 기획 ‘경북민심번역기’ 여덟 번째 방문지로 경북 경주를 찾았다. 경주의 첫인상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역대 지방선거 출마-당선 연혁 데이터를 통해 확인한 경주는 여느 경북 도시와 다른 결과가 눈에 띄는 도시다. 경주 역시 여느 경북 도시들처럼 보수성이 높지만, 동시에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다. 여섯 차례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경북에 출마한 진보정당 기초단체장 후보는 8명인데 그중 3명이 경주에서 출마했다. 23개 경북 도시 중 가장 많은 수다.
2006년 4회 지방선거에선 한나라당 4명, 열린우리당 1명, 민주노동당 1명씩 비례 시의원 후보를 냈는데, 민주노동당이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꺾고 비례 시의원을 배출했다. 이때 민주노동당이 경주에서 얻은 득표는 12.6%. 열린우리당(11.59%)에 약 1% 앞섰다. 역대 선거에서 민주-진보 정당은 비례 대표를 통해서만 경주 선출직 공직에 진출했는데, 그 첫 번째가 진보정당이다. 자료만 놓고 예상한 경주는 보수성이 짙지만, 진보적인 선택도 가능한 합리적 도시였다.
14일 오전 11시 15분께, 경주역에서 인터넷 라이브 방송을 시작해 불과 300m를 걸은 후부터 예상은 깨지기 시작했다. 경주역에서 300m 떨어진 노상에는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아니라 손석희의 태블릿 PC 뻥이었다! 반역자 손석희 구속하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대한민국살리기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세워놓은 입간판이었다. 입간판은 데이터가 말해주지 않은 경주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징후였다.
“30년 핵발전소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탈핵 정책으로 복잡한 속내
“대통령 바뀌고, 대출 어려워져···우리 같은 서민들은 힘이 들지”
팍팍한 현실이 소환하는 과거의 영광, ‘박정희 신화’
보수는 먹고 사는 문제 해결하는 세력이라는 인식으로
경주에서 만난 시민들은 ‘보수성’을 짙게 드러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를 불신했고, 문재인 정부 집권 후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보수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세력이라는 의식이 깔린 듯 보였다. 먹고 사는 문제는 정부의 탈핵 정책 성패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이상홍(44)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내다봤다.
이상홍 사무국장은 탈원전 정책에 대한 주민 반응이 어떠냐는 물음에 “복잡한 문제”라면서 “멈추면 좋긴 좋은데, 이 지역이 지난 30년간 거의 핵발전소를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해 왔잖아요. 갑자기 핵발전소가 멈추면 경제적 생존 문제에 큰 타격이 오지 않을까, 걱정과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이 국장은 “정부에서 주민들의 우려까지 잘 다독여서 탈핵 정책을 좀 더 적극적으로 펼쳐야 하지 않겠나”고 덧붙였다.
먹고 사는 일은 탈원전 정책부터 정치적 보수성까지 온갖 것에 관여하는 듯 보였다. 최순실 태블릿PC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입간판에서 5차로 도로를 건너가면 40대 여성 류 씨가 운영하는 청과노점이 있다. 류 씨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노코멘트라면서 “솔직히 다른 건 모르겠고,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사람들한테 더 힘든 거 같다. 대통령 바뀌고 대출이 어려워졌고, 법이 바뀌었으니까···. 우리 같은 서민들은 힘이 들지”라고 문재인 정부 이후 은행 대출 문턱이 높아졌다고 볼멘소리했다.
팍팍한 현실은 과거의 영광을 끄집어냈다. 류 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솔직히 정치는 진짜 잘했잖아요? 꼭 경주에만 그렇게 한 건 아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거지만, 박정희 같은 경우는 좀 더 했으면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면서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했다. 40대라고만 밝힌 류 씨에게 박정희 시절은 길어야 유년 시절 10년이 전부일 테다. 현실의 팍팍함은 철없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내 ‘박정희가 더했으면 나아졌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류 씨 보다 더 긴 세월 ‘박정희’를 경험한 사람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테다. 상동시장에서 참기름 가게를 운영하는 77살 여성은 “박정희는 정치 잘한 거 아니야? 그분이 대한민국 살려놓은 거 아니가?”라고 박정희를 존중했다. 박정희에 대한 존중은 그대로 박근혜에 대한 측은지심과 존경으로도 이어졌다.
“박근혜가 원래 저그 엄마 죽고, 저그 아빠 옆에서 많이 배웠을 거야.
그런데 나는 박근혜가 같은 여자로서 보면 불쌍해.
처녀로 애기도 못 낳았지,
말로(뭐하러) 나라에 나와가지고 그 고통을 받느냐 그 말이라.
평(범)하게 살지.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볼 때 불쌍해”“여자로서 보면 불쌍하고, 정치인으로는요?”
“아무래도 저그 아부지한테 배웠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분(이번) 대통령보다는 박근혜가 낫다고 봐”
“박근혜 때문!” 문재인 정부 탄생 원인 제공한 ‘박근혜’ 원망
“홍준표도 문제” 문재인 정부 탄생을 막지 못한 ‘꼰대’
“산업화 이끌어온 건 완전 무시, 데모하는 사람만 영웅, 이게 나라가?”
“보수라는 게, 그런 보수가 아니고. 나라 발전하는 세력이라고 해라”
물론 경주에서 만난 모든 시민이 참기름집 여성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부동산을 운영하는 43살 동갑내기 친구들은 박근혜를 두고 “배신해야 할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근혜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그의 실정보다 자신들의 삶을 어렵게 만든 문재인 정부 탄생에 원인을 제공한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들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길 하다가 대뜸 “박근혜 때문이라”, “박근혜가 너무 심하게 했잖아”라고 말했다. ‘박근혜 때문’이라는 말의 진심은 곧 이어진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더 분명해졌다.
“다녀보면 박근혜 비판하는 분들이 많더라”
“그런데, 그러면 차기로 올라온 사람도 잘하면 되는데”
“홍준표도 문제다”
“홍준표가 문제지”
“오빠야도 문제다, 홍준표 오빠야도”
동갑내기 친구들은 주거니 받거니 “박근혜 때문”에 보수 정치 세력의 대표 주자로 급부상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대선에서 홍 대표에게 표를 줬다는 정 씨는 “우예(어찌) 똑똑한 사람 하나 있으면 당이라도 지지할 건데, 자꾸 나와서 쓸데없는 말만 하고, 꼰대같이 그러니까, 너무 부끄러워요”라고 홍 대표가 ‘문제’인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은 ‘부끄러운 홍준표’ 대신 ‘똑똑한 유승민’이 보수의 대표 주자로 나서 보수 세력을 재편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이들이 보수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이유는 현 정부 또는 진보 정치 세력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이 없거나 이를 해결한 사람을 터부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대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두 친구는 스스로 ‘보수’라면서도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라는 말을 알리바이 삼았다. 이들은 “통일도 좋”지만 “사람이 살도록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동시장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65살 남성은 좀 더 분명하게 ‘보수’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세력’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누나들이 독일에 가가 돈 벌어가 부쳤제. 우리가 사우디 가가(사우디 가서) 그랬제. 산업화 이끌어온 건 완전 무시하고, 데모하는 사람만 영웅 되고, 이게 나라가? 데모꾼만 영웅 되고 산업화한 사람은 무시하고! 보수라는 게, 그런 보수가 아니고. 나라 발전하는 세력이라고 해라. 보수는 무슨 보수고, 나라 발전시키는 거지. 지금 우리나라 원천이 어디서 왔는데! 그때 (노력)한 사람은 다 무시하니까!”
먹고 사는 일은 경북에서 유독 민감한 주제로 언급될 가능성은 높다. 고정 임금을 받는 인구가 많은 도시보다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도시가 체감 경기는 더 나쁠 것이기 때문이다. 경북은 2015년 기준으로 15세 이상 취업인구 중 자영업자 비율이 두 번째로 높은(30.1%) 광역시·도다. 바꿔말하면 임금노동자가 두 번째로 적다(59.9%)는 의미다.
경주는 구미, 포항, 칠곡, 경산과 더불어 경북 시·군 중 임금노동자가 많은 5개 도시 중 하나다. 모두 산단을 중심으로 제조업체가 모여 있는 도시다. 경주는 5개 도시 중에서 임금노동자(62.9%)가 가장 적고, 자영업자(28.9%)가 가장 많다.
임금노동자 적고, 자영업자 많은 경북
임금노동자가 미치는 정치적 선택의 변화
경주도 마찬가지···임금노동자 거주지 보수색 옅어
임금노동자 비율은 경북에서 정치 지형에도 꽤 큰 영향을 미친다. <뉴스민>이 ‘경북민심번역기’ 방문지로 찾은 경북 도시 중 다른 도시에 비해 진보적 성향을 보인 도시는 구미와 포항처럼 임금노동자 비율이 높은 도시였다. 경주 역시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진보정당 비례 시의원을 배출하는 등 진보적 선택을 하던 순간이 있었는데, 이는 임금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상대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안정적인 데다 노동조합 운동이 결합한 임금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용강산업단지 소재지로 젊은 임금노동자들이 많은 경주 황성동에서 진보정당 지지가 높게 나왔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황성동은 4회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에 20.2% 지지를 보였다. 열린우리당에 11.4% 지지를 보낸 것에 비해 약 2배 높은 지지다. 황성동은 이후에도 진보정당에 상당히 높은 지지를 보내왔다.
진보정당 운동에도 참여한 이상홍 경주환경련 사무국장은 “많은 분이 경주를 관광도시로만 생각하고 작은 도시로 여기는데, 제조업이 상당히 탄탄한 도시”라며 “민주노동당에서 비례대표가 당선되던 시절은 이 지역에서 노동운동이 활짝 잘 나갈 시기였고, 진보정당도 주민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던 시기”라고 제조업 중심 노조 운동이 정치적으로 진보적 선택을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체감 경기가 어렵고, 노동운동이 쇠퇴한 상황에서 경주가 과거의 진보적 선택을 이어갈 거라 볼 수 있는 지표는 많지 않다. 다만, 이상홍 국장은 “선거판만 놓고 보면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거판이 촛불 이후 경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며 “민주당 외에도 진보정당 후보도 있고 개혁진영 무소속 후보들도 출마해 있다. 셈을 해보진 않았는데 (개혁진보 후보가) 10명은 넘는 것 같다. 과거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