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펜스룰, 공감 실종의 시대 / 배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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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최근 지인과의 대화를 통해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 택시에서 여성 혐오 발언을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중년의 남성 택시기사가 안희정 전 충남지사 얘기를 꺼내며 피해자에게 “그 쌍X이”라고 말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한마디 하지 그랬어”라고 힐난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꺼냈을 때 남성 택시기사가 그녀에게 호통치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된다고 했다. 택시가 밀폐된 공간이라는 점도 두려웠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성인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어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어 상상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험하기 힘든 고통이 존재한다. 여성과 같이 타고난 정체성으로 인한 피해가 그렇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폭력을 경험할 일이 드물다. 때문에 여성들이 왜 ‘친구에게 집에 들어가면 꼭 연락을 하라고 하는지’, ‘남성 택시운전사가 여성 혐오 발언을 해도 왜 거기에 쉽게 반박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상황에도 여성은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남성은 한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개입되지 않으니 공감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니 여성들에게 ‘쓸데없이 예민하다’, ‘프로불편러다’라고 말한다.

공감하기 힘든 고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일까? 나 역시 동일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로부터 수평적 공감을 끌어내고 연대하는 것이 아닐까. <타인의 고통>을 쓴 수전 손택 역시 겪어본 적 없는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가닿지 못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고통에 연대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는 ‘당면한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적었다. 남성인 나는 여성들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선 여성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들어야 알 수 있고 알아야 잘못된 관념을 고칠 수 있다. 경청은 공감하지 못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반대로 가는 모양새다. 최근 웹툰 작가 기안84가 여성 팬에게 던진 농담이 논란이 됐다. 그는 팬에게 “미투 때문에 가까이서 사진 찍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행동은 ’여성과 가까이서 접촉하거나 함께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펜스룰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펜스룰은 미투운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성범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남성들의 노력처럼 보이지만 여성을 사회에서 배제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성차별일 뿐이다. 이는 역으로 남성들이 여전히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배제는 사회적 우위를 점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행위다. 만약 임원진이 모두 여성인 회사에서 남성 사원들은 펜스룰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은연중에 남성이 여성을 자신과 분리해 위계를 구분하지 않았다면 펜스룰은 나올 수 없는 방법이다.

이러한 내면의 위계 구분은 반드시 선택적 공감을 가져온다. 인간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고통에 무관심하다. 연루되지 않으니 감정이입을 못 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한다. 차라리 사회적 우위를 함께 점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공감한다. 동일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주장이 자신의 미필적 고의를 합리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매번 등장하는 꽃뱀 담론, 성범죄를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행위, 성범죄 가해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남성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선택적 공감은 피해자들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무고죄에 대한 자기방어일 뿐”이라는 펜스룰 역시 사회적 우위를 점한 이들이 만든 선택적 공감의 결과다. 이는 현재의 기득권은 유지한 채 실질적인 위협을 받는 여성들의 피해는 방관만 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펜스룰이 확산되며 직장은 물론이고 대학가에서까지 여성과 사적인 자리를 피하는 남성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우리의 지향점은 이러한 모습의 정반대가 돼야 하지 않을까. 사적인 자리에서 여성과 대화하며 그들의 고통을 경청하고 선택적 공감을 불러오는 내면의 위계 구분을 걷어내는 것. 그리하여 내 안의 잘못된 관념을 고쳐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고통을 줄이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