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4일, 한진그룹 조양호 일가의 상습적 갑질에 견디다 못한 전‧현직 직원들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오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광화문 세종문회회관 계단에서 촛불을 들었다. 명실상부한 노동자의 저항임에도 상급단체는 민주노총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어떤 단체나 조직과도 연대하지 않고 ‘고립’을 자처하고 있다. 세(勢)를 불려도 모자랄 판에, 왜 그러는 것일까? 여기엔 명확한 이유가 있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경험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동시에 그 합리적 행동이 장기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점 역시 명확하다.
‘대한항공 직원연대 단톡방’을 개설해 운영하는 익명의 ‘관리자’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대한항공 노조의 상급단체 중 하나가 민주노총이다. 그들이 개입하면 역효과만 난다. 순수성을 의심받게 된다.” 대한항공 촛불집회 즈음 직장인 익명 게시판 애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민주노총이 직원들을 서로 믿지 못하게 만들고 편 가르기를 해 대한항공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민주노총이 종로경찰서에 촛불집회 신고를 했다” 대부분 사실무근이지만 이런 루머의 범람은 직원들의 현재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집회에 참여한 대다수 대한항공 직원들은 노동조합이나 정당 같은 ‘외부세력’에 극도의 불신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외부세력’과 ‘순수직원’의 구분은 명확했고, ‘외부세력’의 개입은 투쟁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오염’이었다.
히스테릭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의 거부반응은 사실 조직 내부적 경험칙에 근거한 합리적인 행위다. 우선 이들은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경험한 적이 없다. 직원 2만여 명 중 1만 1천여 명이 가입한 최대 노조는 ‘대한항공 노동조합’이다. 임금협상을 회사에 위임하는 행태 등으로 일각에서 “어용노조”라고 비판받는 조직이다. 조종사 중심의 다른 두 노조는 대표성이 떨어지고 전체 직원의 신뢰가 두텁지도 않다. 그렇기에 그들은 조합원이나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익명의 직원이자 개인으로 저항하려 하는 것이다.
사회적 경험칙도 강력하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 2016년 이화여대의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반대 투쟁이 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은 다른 대학교 학생들의 연대투쟁 제의는 물론, 이대 내부 운동권들까지 철저히 차단했다. 세월호 리본, 메갈리아 티셔츠, 위안부 팔찌 착용도 금지했다. 결국, 교육부와 대학 측은 여론전에서 밀리며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을 철회해야 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다. 언론은 “지도부 없는 느린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찬사를 보냈다.
이대 투쟁과는 다소 다르지만,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도 순수성 강박이 나타난 점은 유사했다. 집회 현장에서 노동 의제나 기타 진보적 의제를 언급하면 금세 “프락치”라는 비난이 날아들었다. 참가자들은 틈만 나면 ‘순수한 일반시민의 비폭력 평화집회’를 강조했다. 이런 사례들이 보내는 신호는 명확하다.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조건 외부세력을 차단하고 순수성을 강조하라!’
그러나 순수성을 추구하는 저항은 필연적으로 ‘뺄셈의 저항’이 된다. 우리 편은 줄어들기만 할 뿐 결코 늘어나지 않는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순수한 것은 얼마든지 불순해질 수 있지만 한번 불순해진 것은 다시 순수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해서, 이 프레임에서 승리하려면 무조건 빠른 시간 안에 결판을 내야 한다. 시간은 적(敵)의 편이란 뜻이다.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는 순수성 강박을 보이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참가자가 점점 늘어났는데, 이것은 사안 자체가 국가적 의제였기 때문이다. 매주 수백만 인파가 모여서 일국의 대통령을 탄핵한 시위를 사회 투쟁의 일반 모델로 삼는 건 무리다.
이대 투쟁이 고립되었으면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기간이 비교적 짧았고 목표와 로드맵을 구성원이 명확히 공유했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항공 집회는 이대 투쟁과는 다르다. 목표와 로드맵은 모호하고, 일정은 기약이 없다. 이런 경우 순수성 강박이 되레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대한항공 투쟁에 지도부와 조직이 없으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통한다는 점을 강점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2011년 아랍에서 ‘재스민 혁명’이 발발했을 때 세계 언론은 “소셜미디어 혁명”이라 흥분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중앙일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는 “아랍사태는 문명사적 M(모바일)혁명”이라고 규정하고, “모바일로 무장한 유목민들은 횡단적으로 끊임없이 연결‧접속하면서 아랍의 오랜 전제체제와 구악을 하나씩 청산할 것”이라 자신만만하게 예언했다. 2018년 현재, 우리는 재스민 혁명이 어떻게 귀결했는지 알고 있으며 저 국제문제 대기자의 예언이 얼마나 허황한 것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유목민적‧수평적‧횡단적 연결.” 듣기는 좋다. 어떤 조건 하에서는 충분히 실현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네트워크 기술 혁명이 곧 사회 혁명은 아니다. 체제와 지배구조를 바꾸는 일은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즐겁게 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플래시몹’과는 다른 일이다.
‘외부세력’에 대한 극도의 거부반응을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시기까지 다다른다. 당시 일본은 ‘불령선인(不逞鮮人·후테이센진)’이란 말을 즐겨 썼다. 불령선인은 ‘일본에 저항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불온한 조선인’ ‘온건하고 선량한 조선인을 부추겨 소요와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조선인은 서로를 ‘불령선인’이라 부르며 끝없이 의심하고 밀고했다. 예나 지금이나 ‘순수’ 대 ‘불순(외부)’이라는 프레임은 저항을 고립시키고 연대를 차단한다.
물론 순수성 강박이 때로 국지적 승리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그것은 절망적으로 낮은 확률의 게임이다. 더욱이 그런 방식의 투쟁은 사회 문제를 오직 당사자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사회적 인간의 핵심이자 사회진보의 동력인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상상하는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불순하다”는 비난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우린 순수하다”가 아니다. 그 비난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우린 공화국 시민이자 노동자이고, 너의 비난은 이 부정의한 사태와 아무 상관없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