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량진에 개장한 스타벅스가 온라인상에서 논란이 됐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몰려있는 노량진 매장이 여느 스타벅스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다른 매장에 비해 유독 높이가 낮은 테이블과 적은 콘센트로 오랜 시간 매장에서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험생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항의의 목소리가 수험생들 사이에서 빗발쳤다. 그러나 대중들은 되려 스타벅스 편을 들고 나섰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수다도 제대로 떨지 못한다” “공부를 왜 카페에서 하냐” 등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향한 부정적 댓글들이 기사를 가득 채웠다. 노량진 스타벅스 논란은 우리 사회가 카공족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이 그대로 반영된 사례다.
카공족 논란은 일차적으로 카페라는 ‘여가 공간’에 변화하는 ‘공부 문화’가 융합되면서 불거진 논란이다. 여러 용도로 카페를 활용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카페에 대한 대중적 시선은 여전히 “차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곳”에 머물러 있다. 어느 정도의 시끌벅적함이 허용되는 곳이 카페다. 이곳에 몇몇 이들이 책을 들고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되려 담소를 나누던 이들이 옆자리에서 공부하는 이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정당당하게 커피값을 지불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던 이들이 공부하는 이들 때문에 본인의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 대개 공부하는 이들이 카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냄에 따라 테이블 회전율에 문제가 생긴다는 사업주들의 불만이 얹어졌다.
이들의 주장처럼 대중적 정서에 따라 카페는 여전히 공부보다는 담소에 어울리는 장소이고, 커피값 5000원의 소비에는 커피값 뿐 아니라 일정한 자릿값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공부하는 이들이 카페 영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이는 카페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고, 상생의 원리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문제는 카공족에 대한 시선이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 ‘조롱’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카공족과 관련된 기사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댓글은 “공부는 도서관에서 해라” “자리 차지하지 말고 프렌차이즈 커피 사 먹을 돈으로 책이나 사라”등이다. 이는 단순히 카페를 이용하는 이들 간의 갈등을 넘어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공부는 독서실 혹은 도서관에서 하는 것이지, 카페 같은 열린 공간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부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과거에는 도서관이나 독서실 같은 닫힌 장소가 능률적 학습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을지 모른다. 정보가 오로지 책 속에 제한되어 있고, 학력고사나 고시같이 ‘외우기’에 최적화된 시험 준비가 공부와 등치 되던 시절에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문화적 시설로부터 고립되어 장시간 자리에 앉아있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공부 폐인’에 대한 보상은 경제적 보상으로 치환되는 노동할 수 있는 권리다. 결국 과거에 ‘학습’과 ‘교육’은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도구적 수단에 불과했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일반적인 ‘고시생’의 모습으로 연상되는 자기희생이 당연히 전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공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과거와 달리 필요한 정보들이 인터넷 곳곳에 널려있고, 수많은 정보 중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습득하고 이를 가공할 줄 아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접근성이 용이한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은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과거의 공부방식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은 잔존하는 근대성의 폭력이다.
나아가 “프렌차이즈 커피 사 먹을 돈으로 책이나 사라”는 조롱의 언사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공부를 노동할 권리를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열심히 공부해서 노동하고, 오직 그 노동의 대가로 정당하게 소비할 자격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인분의 노동을 하지 못하는 이들의 소비에 대한 폭력적 간섭이다. 대개 공부하는 이들은 노동시장에 편입하지 못한 채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이들이 부모로부터 혹은 국가로부터 받은 돈의 씀씀이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본인이 직접 번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자유롭게 소비할 권리는 박탈된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는 이들이 경제적 혜택을 받았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가 없고, 그 재원을 필요 이상의 것에 소비했다고 해서 쉽게 ‘사치’라고 낙인찍을 이유 또한 없다. 표면적 갈등 아래 숨겨진 카공족이 불편한 이유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 이들과 카페라는 공간을 함께 누리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