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방송된 MBC 뉴스투데이에는 임현주 앵커가 동그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여자 앵커들도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었다. 보면서 신선하든, 낯설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안경 착용 자체가 호불호가 있을 수 있어서 방송 이후 시청자들의 반응을 잘 살피고자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아직도 여성 앵커의 안경을 뉴스 삼고, 쓰고 나온 앵커마저도 ‘호불호가 있을지 걱정’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임 아나운서가 이런 세태에 균열을 낸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임 아나운서 개인의 용기지, 언론사 내부의 진일보라고는 볼 수 없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전히 예쁘고,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으며, 젊고, 젊지 않다면 젊어 보이기라도 한다. 게다가 모두 신체가 멀쩡한 비장애인들이다. 그것이 뉴스가 생각하는 ‘신뢰감을 주는 단정한 모습’인 것이다.
아주 제한적인 외양을 한 사람만이 앵커의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언론사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 지금껏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아서, 여성 앵커 한 명이 외모지상주의에 균열을 조금 낸 것 가지고 700개가 넘는 기사가 쏟아지게 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언론사 내부에 ‘안경 쓰지마, 무조건 화장해야 해, 예쁘지 않은 앵커는 필요 없어’라는 규칙이 있었을 리는 없다. 단지 ‘안경을 안 쓰는 게 자연스럽지, 화장하면 단정해 보이잖아, 예쁘면 시청자들이 더 좋아하겠지’라는 형태로 존재했을 것이다. ‘시청자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불문율은 그렇게 긍정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추악한 긍정이다. 그 긍정은 시청자를 그저 예쁜 외모를 소비하는 사람으로, 편견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는 사람으로, 화면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관음하는 존재로 가정한 것이다.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문제를 교정할 수 있는 존재로서 시민을 규정하고 기사를 내보내는 태도와 상반된다. 설사 시민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고발하고 고치자고 주장하는 것이 언론사의 의무다. 장애인은 시설에 가두고, 성소수자는 벽장 속에 가두고, 여성은 화장 속에 가두는 세상이다.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 앵커의 모습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 표백된 것이다. 소수자를 눈앞에서 지우고 숨기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얼굴이다.
우리 사회의 인식 상 아직 성소수자가 앵커 자리에 앉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우리나라보다 더 경도된 사회라는 평가를 받는 파키스탄에서는 이미 트랜스젠더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고 있다. 장애인이 방송을 진행하기는 힘들지 않겠냐고? <BBC 노스웨스트>에는 한쪽 팔이 없는 루시 마틴이 기상캐스터를 하고 있다. <프랑스 2> 채널에서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멜라니 세가르도 기상캐스터로 나섰다. 소수자가 뉴스에 나올 순 있겠지만 지지받기엔 힘들거라고? CNN 간판 앵커인 앤더슨 쿠퍼는 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다.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다. 13년째 여성 총리만 뉴스에서 보고 있는 독일 어린이 중 일부는 ‘원래 총리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단다. 가끔 ‘남자는 총리를 못 하냐’는 질문도 나온다고 한다. 그게 매체의 힘이다. 수많은 소수자들이 매체에 얼굴을 비추고 싶어 하는 이유다. 뉴스가 도전하는 만큼 세상은 바뀐다. 안경 쓴 여자 앵커를 넘어, 뉴스에서 시각장애인 앵커도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