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21) 누이야 장하고나!

13:49

[=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 그 “앉음새”의 모양새를 크게 바꾸게 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의 지휘로 ‘반공을 국시’로 한 쿠데타가 벌어졌다. 이 일로 김수영의 충격은 대단히 컸던 것 같다. 혁명의 퇴행 끝에 반혁명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평전』에 의하면 김수영은 쿠데타 직후 친구인 소설가 김이석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 쿠데타군은 심지어 서정주와 조지훈마저 연행해갔다. 하물며 혁명에 ‘미쳐 날뛴’ 김수영이 ‘반공을 국시’로 내건 쿠데타군에게 끌려가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평전』에는 김이석의 집에 피신해 있던 상황을 짧게 설명해주고 있다.

어쨌든 김수영은 김이석의 집으로 5월 16일 피신했고, 그 집에 숨어든 뒤로 쿠데타군이 눈이 시뻘개가지고 찾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밖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김이석과 박순녀가 시내로 나가 동정을 살펴왔다. 그들 부부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을 때는 김이석의 어린 아들에게 밖에 누가 없는지 살펴오게 했다. 김이석의 아들은 바빴다. 그는 대문 밖에 군인이 없는지 보아야 했으며, 담배를 사러 나가야 했으며, 부모들이 오는지도 보아야 했다. 김수영은 하루 종일 담배를 뻑뻑 피웠다.

밤이 되면 김수영의 표정은 달라졌다. 김이석이 사들고 온 진로소주잔을 몇 잔 비우고 나서는 레드 콤플렉스에서 풀린 듯 쿠데타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술에 취해 파리로 가야겠다고 했다. 파리에 가서 현대문학과 현대예술에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했다. 우리 문학에는 ‘현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무의식도 없으며 앙가주망도 없다는 것이었다.(308)

일주일 동안 사라졌다가 김수영은 머리를 박박 깎은 채로 나타났다.

쿠데타 이후 그가 처음 남긴 작품은 「여편네의 방에 와서-신귀거래1」이다. 전집에는 1961년 6월 3일로 표기되어 있다. 이후 ‘신귀거래’ 연작을 석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9편을 쏟아낸다. 전체적인 내용과 중언부언하는 형식을 보건대, 그는 나름대로 그 상황을 시적으로 돌파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여편네의 방에 와서-신귀거래1」는 이렇게 시작한다. 1연 전체이다.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 해도
나는 이렇듯 소년처럼 되었다
흥분해도 소년
계산해도 소년
애무해도 소년
어린 놈 너야
네가 성을 내지 않게 해주마
네가 무어라 보채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성을 내지 않는 소년

_「여편네의 방에 와서-신귀거래1」 부분

이 작품은 시의 화자의 리비도를 스스로 억압하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목소리나 리듬 등에 두려움이나 회한 같은 정서가 배어 있지는 않다. 1연의 “네가 성을 내지 않게 해주마”와 2연의 “이제 성을 내지 않는 법을 배워주마”는 상호 조응하면서 3연의 “어린애”의 반복을 불러온다. 3연에서 “어린애”의 반복이 ‘귀거래’의 속뜻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다. 즉 이 연작의 ‘귀거래’가 뜻하는 것은 현실에서 전면적 퇴장을 하겠다는/해야 할 것 같다는 체념의 정서를 가리킨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너를 더 사랑하고/ 오히려 너를 더 사랑하고/ 너는 내 눈을 알고/ 어린 놈도 내 눈을 안다”이다. 행간에 배어 있는 것은 어쩐지 체념의 정서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로의 “눈을 안다”는 것은 눈을 감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신귀거래’ 연작이 난삽하다면 이러한 어떤 불일치, 이제 리비도를 제거하고 체념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아직도 “사랑하고” 서로의 “눈을 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격문(檄文)-신귀거래2」에 와서 “깨끗이 버리고”를 마치 주문처럼 뇌까리는 것도 버려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아아 그리고 저 도봉산보다도/ 더 큰 증오도/ 굴욕도/ 계집애 종아리에만/ 눈이 가던 치기(稚氣)도/ 그밖의 무수한 잡동사니 잡념까지도/ 깨끗이 버리고” “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으니 이제 모든 게 “편편하”다는 것도 일종의 자기주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시의 화자가 “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는 것은 김수영 특유의 역경주의, 타개할 수 없는 난관이나 딜레마에 빠졌을 때 구체적인 ‘일’을 통해 “온몸”으로 뚫고 나가려는 기질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버리려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쿠데타 이전에 이미 버리려 했던 “머리”도 포함되는데, 쿠데타가 터지자 자신이야말로 “속이 허해서” 혁명을 외친 것이라는 씁쓸한 패배감을 표현하고 있다. 쿠데타라는 반혁명에 기대 이제 모든 것을 “깨끗이 버리고”, 말로만 외쳤던 “온몸”을 가지려 “농부의 몸차림으로 갈아입”은 것이다. 그러자 “펌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온다”. “펌프의 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자 자신이 “정말 시인이 됐”다는 느낌이 온다. 하지만 이런 양가적인 상태는 건강의 상태가 아니다. “병든 도피”(니체)까지는 아니지만 일종의 ‘건강한 병’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면 ‘신귀거래’ 연작 전체는 새로운 ‘시의 몸’을 얻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쓴 「등나무」, 「술과 어린 고양이」, 「모르지?」에서는 그냥 요설만 낭자한데, 이 요설도 어떤 ‘견딤’의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이 세 작품에서는 ‘마시는 행위’가 공통으로 드러난다. 「등나무」에서는 “밤사이에 이슬을 마신 놈이/ 지금 나의 혼을 마신다/무휴(無休)의 태만의 혼을 마신다”고 하고, 「술과 어린 고양이」에서는 “내가 내가 취하면/ 너도 너도 취하지/ 구름 구름 부풀 듯이/ 기어오르는 파도가/ 제일 높은 사안(砂岸)에/ 닿으려고 싸우듯이/ 너도 나도 취하는/ 중용(中庸)의 술잔”이라고 썼으며, 「모르지?」에서는 “술이 거나해서 아무리 졸려도/ 의젓한 포즈는/ 의젓한 포즈는 취하고 있는 이유,/ 모르지?/ 모르지?”라고 자조하고 있다. ‘신귀거래 연작’이 대체적으로 요설과 중언부언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것은 그 당시 김수영의 내적 상태가 얼마만큼 혼란스러웠는지를 증명해준다.

하지만 연작의 일곱 번째 「누이야 장하고나!」에서는 자신의 무의식에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과거를 직시하려고 시도한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너는 이 말의 뜻을 아느냐
너의 방에 걸어놓은 오빠의 사진
나에게는 <동생의 사진>을 보고도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진혼가를 피해 왔다
그전에 돌아간 아버지의 진혼가가 우스꽝스러웠던 것을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그 사진을 10년 만에 곰곰이 정시(正視)하면서
이내 거북해서 너의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10년이란 한 사람이 준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다

_「누이야 장하고나!-신귀거래7」 1연

아마 전쟁 중에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진 동생 수경의 사진일 것이다. 김수영이 수경의 “진혼가를 피해”온 것은 그의 생사가 불분명한 탓도 있지만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세월”이 더 큰 원인일 것이다. 그의 상처는 “한 사람이”, 즉 동생 수경의 행방불명이 준 상처이면서 동시에 전쟁이 그에게 준 상처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그는 지금껏 “정시(正視)”하며 살아오지 못한 것이다.

역사가 그에게 준 이런 내면의 상처는 이 작품 이전 해인 1960년 12월에 쓴 「나가타 겐지로」에서도 얼핏 보인다. “이북으로 갔다는 김영길이” 이야기가, 즉 월북한 나가타 겐지로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별안간 가만히 있었다/ 씹었던 불고기를 문 채로 가만히 있었다”. 김수영은 여기서 다시 “신”을 불러들이는데, 앞에서도 말했듯 그는 납득 불가 혹은 이성적인 판단을 중지시키는 불가항력 앞에서 “신”을 언급하곤 한다. 혁명이 있었던 1960년 당시에도 그의 내면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 있는 전쟁의 상처가 그에게는 ‘신의 장난’이었던 것이리라. 이런 그에게 누이의 방에 걸려 있는 행방불명된 “<동생의 사진>”은 여전히 상처였다.

1961년 현재 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대해 그가 처할 수 있는 자세는 “풍자가 아니면 해탈” 뿐이다. ‘반공을 국시’로 내건 쿠데타 정권의 등장은 그에게 매우 엄중한 실존적 위기를 가져왔던 것이다. 쿠데타 정권의 등장은 10년 전의 과거를 의식 세계로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만들어낸 “사람의 죽음”을 우습게 만들었다. 조금 더 최근의 일로는 4·19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죽음의 의미를 뭉개버린 것이다. 2연에서 “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우스워하지 않고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고 연달아 말하는 것은 김수영이 얼마나 그것을 뼈저리게 되새기고 있는지를 증명해주며 이것은 또 울음의 다른 표현이다. 즉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로 시작되는 2연 전체는 일종의 울음인 것이다.

우스워진 죽음이 비단 수경의 죽음 혹은 실종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3연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3연에서 “나는 분명히 그의 앞에 절을 했노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나간 죽음들에 대한 제의이기도 하면서 죽음에 대한 다른 방식의 각인이기도 하다.

누이야
나는 분명히 그의 앞에 절을 했노라
그의 앞에 엎드렸노라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하고 숭배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니까
동생뿐이 아니라
그의 죽음뿐이 아니라
혹은 그의 실종뿐이 아니라
그를 생각하는
그를 생각할 수 있는
너까지도 다 함께 숭배하고 마는 것이
숭배할 줄 아는 것이
나의 인내이니까

_「누이야 장하고나!-신귀거래7」 3연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하고 숭배하는 것”은 맹목이 아니라 “신”에 대한 긍정의 다른 이름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김수영의 “신”은 불가해한 사건을 가리킨다. 실존 상황이 마주친 불가해한 사건 앞에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항복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김수영은 ‘한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긍지의 시인이었기에 불가해한 사건, 즉 한계를 긍정하는 순간 변신의 기운이 생동하기 시작한다. 4연에서 “나는 쾌활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이 광대한 여름날의 착잡한 숲속에/ 홀로 서서/ 나는 돌풍처럼 너한테 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쿠데타로 인해 시작됐던 자신의 퇴행과 반동에 대한 반작용이다. “모든 산봉우리를 걸쳐 온 돌풍처럼”은 다시 긍지를 회복하고 있다는 자기표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