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먹칠] 4월은 우리에게 옛날의 4월이 아니다 / 이기쁨

12:57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타인’이었다. 그는 내게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흑백 사진 속의 낯익은 사람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다. 할아버지의 몸에는 6‧25전쟁 때 누가 쐈는지도 모를 총알이 여러 개 박혔다. 왼쪽 손에 박힌 총알은 훈장처럼 평생을 함께했다. 아빠도 술을 좋아했다. 할아버지의 추모예식 때, 아빠는 처음으로 그 얘길 꺼냈다. 나는 처음으로 오랜, 치유되지 않은 그들의 고통과 마주했다. 먹먹했다. 관계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아빠의 아빠’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기 시작했다.

그 날 나는 기숙사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단 뉴스가 흘러 나왔다. 기숙사 식당은 고요했고, 뉴스의 메시지는 선명했지만, 나는 밥을 마저 다 먹었다. “또 사고가 났네, 큰일이야! 다들 무사히 구조돼야 할텐데….” 나는 승객들의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건 분명 비극이었지만 한국 사회에 늘 있어왔던, 불운한 사람들의 불행이지 나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나에게 타인이자, 사회적 풍경일 뿐이었다. 나중에 배 안에서 죽어가던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중계되면서 나는 괴로웠다. 그 아이들은, 내 어린 동생보다 고작 한 살이 많았다. 살려달라는 아이들의 비명은 더는 외면할 수 없게 하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 당겼다.

결국 나는 광장으로 나가게 됐다. 가라앉는 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단 무기력함에 대한 자책과 뭔가 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나를 광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광장에서 세월호의 아이들을 만났다. ‘항상 마음만은 그대 곁에 있다’는 따뜻한 글을 썼던 아이, 무대에 서길 꿈꾸며 ‘거위의 꿈’을 불렀다던 아이, 그 아이들은 더 이상 뉴스 속에만 존재하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를 광장으로 불러 모았고, 우리는 그들의 고통 때문에 하나가 됐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촛불과 함께 세월호의 고통을 다 함께 기억했다. 기억들은 서로 옮겨 붙어 변화를 이끌어냈다.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세월호는 인양되었으며, 진상 규명을 위한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 그제야 사람들은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가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4월이 됐다.

4월은 꺼내지 못한 기억이 유독 많다. 제주4·3은 역사적 기록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바람만 불어도 아프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이 없다는, 슬픈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려고 한다.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그들의 고통을 우리의 문제로 위무하는 사과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당신과 나는 4.3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아가 광주5·18과 용산 참사와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행여 사회적 참사를 ‘우연한 사고’로 정의하고, 단순히 죽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정도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통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슬픔의 주체가 되길 포기해 온 것은 아닐까?

나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당신이 세월호를, 용산을, 광주를, 제주를, 이름조차 붙여지지 못한 많은 슬픔들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 궁금하다. 일상에서 그 이야길 나누자. 희생자를 향한 요란한 동정의 제스처 대신, 희생자를 기리며 내가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자. 가장 진정한 추모는 망자의 다 하지 못한 말을 실천하는 것일 테니까. 그들의 마지막 말은 다시는 나 같은 억울한 희생자가 없도록 사회를 고쳐달라는 것일테니까.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내가 그 모든 기억들의 주체가 될 때, 언론과 정치와 국가가 변한다. 4월은 기억의 계절이고, 나와 당신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