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 트럼프는 현 CIA(미국 중앙정보국) 부국장인 지나 하스펠(Gina Haspel)을 새 국장에 지명했다. 국무장관 틸러슨을 해임하면서 마이크 폼페이오 현 CIA 국장을 국무장관으로 지명하고, 후임으로 하스펠을 지명한 것이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면 CIA 70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보듯이, 비밀 정보원의 세계는 거의 남성의 전유물로 묘사됐다. 여성 정보원이 등장하더라도 그건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보조적인 양념 역할일 뿐이다. 그 두꺼운 유리천장을 깬 여성, 그것도 여성혐오의 대명사 트럼프 정권에서 말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여성혐오 기록을 무마할 절호의 기회라도 잡은 듯 하스펠이 CIA 국장으로 지명된 최초의 ‘여성’임을 강조했다.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스펠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녀가 여성차별의 ‘유리천장’을 깼다고 반가워할 수가 없다.
악명 높은 ‘고문의 여왕’
지나 하스펠은 CIA에서 30년 이상 일해 온 베테랑이다. 오랫동안 비밀요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2013년 CIA 핵심 조직인 국가비밀공작국(NCS) 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NCS는 미국이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비밀공작을 지휘하는 CIA의 핵심부서이다. 하스펠은 2017년 2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CIA 부국장이 됐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국장에 지명돼 인사청문회만 통과하면 CIA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스펠은 ‘블러디 지나(Bloody Gina)’라는 별명을 가졌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피에 물든 지나’ 또는 ‘잔혹한 지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악명 높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세계 곳곳에 비밀감옥(일명 블랙사이트)를 차려놓고 불법 고문을 자행한 흑역사에 그녀가 깊숙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2002년 CIA는 태국에서 ‘고양이 눈(Cat’s Eye)’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비밀감옥을 운영했는데, 이곳에 알카에다 조직원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구타, 잠 안 재우기, 관 속에 가두기, 물고문 등 고문을 자행했다. ‘고양이 눈’ 비밀감옥 책임자가 바로 하스펠이었다.
하스펠은 워터보딩(waterboarding)이라는 물고문을 포함해 비밀감옥에서 벌어진 고문을 직접 지휘, 감독한 것으로 알려진다. 워터보딩은 사람을 판에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고 얼굴에 수건을 덮은 다음 물을 들이붓는 고문이다. 폐에 물이 차오르면서 마치 익사하는 것 같은 공포와 고통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2014년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 보고서에 의해 고문 실태가 더 상세히 알려졌다. CIA는 비밀감옥에서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카에다와 연루된 사람들에게 소위 ‘특별심문프로그램’을 사용해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태국의 비밀감옥에서 이 ‘특별심문프로그램’의 첫 실험 대상이 된 이가 알카에다 조직원 혐의를 받은 아부 주바이다라는 사람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CIA 고문기술자들은 주바이다에게 20일 동안 무려 83차례의 워터보딩 물고문을 가했다. 또, 여러 차례 관 속에 가두기도 하고 벽에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CIA는 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주바이다의 목에 수건을 두르는 등 ‘안전조치’를 했다며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모진 고문에도 CIA는 주바이다에게서 아무런 의미 있는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고문으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주바이다는 결국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 후 그는 악명 높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되어 오늘날까지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무자비한 고문과 인권 유린에 하스펠이 직접 개입했을 뿐 아니라 2005년에는 증거 인멸을 위해 고문 과정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없애버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92개의 비디오테이프가 파기됐다.
전세계적으로 고문을 사주하고 자행한 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2017년 유럽헌법인권센터(ECCHR – European Center for Constitutional and Human Rights)는 독일정부에게 고문 책임자인 하스펠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요청했다. 이로써 하스펠이 독일이나 유럽에 가면 체포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유리천장을 깬 여성?
고문은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 폭력이고 인권 유린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가해자에게는 응당한 처벌을 가한다. 미국도 예외 없이 고문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고, 고문 책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은 적도 있다.
예를 들면 2차대전 후 미국은 전쟁 중 미군 포로들에게 고문과 가혹행위를 한 일본군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 사형에 처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워싱턴포스트>는 미군이 북베트남 전쟁포로를 물고문 하는 사진을 실었다. 분노한 여론에 밀려 당시 국방장관은 곧바로 진상 조사를 지시했고, 고문 책임자들은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격하게 진행된 반전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제법에서도 고문은 당연히 불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특히, 미국은 국제 고문방지협약 가입국으로 하스펠 같은 고문 가해자를 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악명 높은 CIA 비밀감옥을 다시 열고 물고문뿐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고문도 부활시키겠다고 수차례 말한 바 있다. 심지어 “고문은 자백을 받아내는데 유효한 방법이다…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테러리스트들은) 고문당해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스펠을 CIA 국장으로 지명한 것은 고문을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를 더 잘 보여준 것이다. 동시에 고문기술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하스펠을 봐라. 고문 책임자도 처벌받지 않고 승승장구할 수 있다’.
하스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그저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특히 그녀가 여성이기에 CIA 국장이 되도록 더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많은 여성들이 견고한 유리천장을 깨고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진출해야 하는 것은 맞다. 세계의 절반인 여성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논의 과정에서 정작 여성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보라. 생물학적 여성이 권력을 가졌다고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지금 감옥에 앉아 있는 그녀가 분명히 보여 주었다.
마찬가지로 하스펠이 여성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대변하는 것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이 더 고통스러워지는 폭력적인 세상일 뿐이다. 고문과 가혹행위가 ‘정상적인’ 심문 방법으로 쓰이는 사회는 여성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복과 안전을 위협할 것이다. 그러기에 하스펠은 여권 신장이나 페미니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스펠이 향해야 할 곳은 인사청문회장이 아니라 법정과 감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