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기억이다. 또, 잊지 않는 기억은 역사가 된다. 제주4.3사건이 65주기를 맞았다. 영화 <지슬>의 흥행과 더불어 국가 폭력에 의한 학살의 기억은 ‘아름다운 섬’ 제주의 아픔을 기억해내고 있다. “역사가들이란 같은 시대 사람들이 잊고 싶어 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빌리자면, 1948년 4월의 제주를 잊지 않고 기억한 이들 모두가 역사가인 셈이다.
새누리당도 ‘제주4.3사건 65주기를 추모하며’란 논평을 발표하고 “제주의 아픔을 감싸 안고 4.3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나아가 새누리당은 화해와 상생의 시대, 국민 대통합의 시대를 여는 데 더욱 앞장설 것을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이 제주4.3사건이라 불렀지만 다른 공당(公黨)인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은 ‘제주4.3항쟁’이라고 부른다. 역사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기억투쟁’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80년 광주는 광주폭동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으로 기억투쟁이 전개됐다. 그래서 제주4.3항쟁의 기억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해방 이후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에 저항한 항쟁은 대게 서울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일어났다. 제주4.3이 그러했고, 대구10월항쟁, 부마항쟁, 5월 광주가 그러했다. 그러나 이들 항쟁은 패배와 아픔으로 남아 있다.
독립적 주민공동체 건설을 위한 항쟁과 학살 참극의 기억
제주4.3사건은 당시 제주도민 30만명 가운데 3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이다.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위원회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었음을 제주도민에게 공식으로 사과하기 전까지 제주사람에게 4.3사건은 기억하기 두려운 과거였다. 이승만 정부의 ‘공산당 척결’의 기치 아래 진행된 학살인데다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상황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 사건이라면 피해자 치유가 우선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21세기에도 지속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민과 수난의 역사에서 멈추는 것이 그 종착점은 아니다. 주민들의 자발적 공동체 건설을 위한 항쟁과 저항의 기억을 망각 저편에서 건져 내야 할 과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제주4.3연구소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47년 3월 1일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다. 이후 경찰 발포에 항의해 관공서와 민간기업 등 노동자 95% 이상이 참여한, 3.10 총파업이 벌어진다. 미군정은 사후처리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한다. 4.3 발발 전까지 1년간 미군정은 2,500여명을 구금하고 테러와 고문이 잇따른다. 이 상황에서 제주는 억압과 통제의 공간으로 변한다.
또한, 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봉기가 공산주의적 이념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봉기였는지는 확인이 더 필요하다. 제주4.3의 기표를 남로당의 4.3봉기의 발발로 보는 것은 오류이자 ‘공산당 숙청’이라는 이유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제주4.3연구소가 밝히듯 제주4.3은 47년 3월 1일 경찰 발포를 시작으로 한다. 그럼에도 정부의 보고서는 3월 1일 총기 발포를 4.3무장봉기의 도화선인 듯 기술하며 남로당의 무장봉기를 학살 사건의 시작으로 인식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평가가 개입한다.
그동안 수구 정치세력은 제주4.3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낙인찍었다. 이는 분단 상황에서 강경진압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민간인을 학살한 가해자는 ‘폭도’나 ‘한민당 정권’이지만, 원인 제공자는 ‘공산당’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이는 제주도민에게 레드 콤플렉스와 자책감, 패배주의를 안겼다.
오래도록 강요된 침묵 때문이었겠지만, 영화 <지슬>의 한계처럼 오늘날 4.3은 ‘항쟁’이기보다는 국가폭력에 의한 ‘양민학살’에서 멈춘다. 양민학살까지는 국가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남북 단독정부 수립과 미군정에 맞선 항쟁의 기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5.18광주항쟁과 대구10월항쟁
80년 5월 광주에서 또 한 번의 국가폭력이 벌어진다. 이후 5월 광주는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기억과의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5월 광주의 기억으로 87년 6월항쟁까지 이끌어냈다. 현재에도 5.18광주항쟁은 민주주의와 국가권력에 맞선 항쟁으로 기억의 역사를 되짚고 있다. 이는 제주4.3항쟁의 기억투쟁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대구10월항쟁 또한 제주4.3항쟁과 유사한 기억을 하고 있다. ‘레드 콤플렉스’와 수구세력에게 강요당한 ‘망각’의 정치.
제주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적이며 반공체제하에서 유력한 후보에게 투표하는 성향이 지속됐다. 이 보수반공세력은 특정 선거에서는 전국적 득표율보다 더 많은 득표를 제주에서 받았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당선된 대선에서 늘 전국 평균 득표율보다 제주 득표율이 높았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오늘날 대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46년 8월 전매청 노동자들의 파업, 총파업에 이어 일어난 대규모 군중시위인 10월항쟁을 기억하는 대구경북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또한 10월 폭동, 대구 폭동으로 기억해왔다. 피해 정도 면에서 제주4.3에 비할 바는 못 되나, 억압의 과정은 유사하다. 10월항쟁을 두고 정부는 오랫동안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등으로 발발했으나, 과격한 투쟁노선을 택한 조선공산당의 선동으로 몰아갔다. 국가권력에 의한 관제기억의 포박은 이후 인혁당 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까지 이어지며 대구에 ‘보수의 아성’을 견고히 했다.
‘기억’의 싸움, 지역 자치의 필요성
5.18광주항쟁의 지난한 기억투쟁은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인식하게끔 했다. 물론, 5.18광주항쟁을 멈춰진 역사에 박제한 때문인지 내부 이권 다툼까지 벌어지고 있지만. 물이 흘러야 썩지 않듯 역사에 대한 기억도 현재와 함께 흘러야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
제주4.3항쟁도 망각한 기억과의 싸움을 지속해서 벌이고 있다. 제주강정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주민들의 저항은 제주가 ‘레드 콤플렉스’를 뚫고 나오는 과정임을 잘 보여준다.
절반의 승리라고 말하는 4.19혁명과 87년 6월항쟁은 중심부 권력과의 직접적 싸움으로 진행되어 이승만을 물러나게 하고 직선제가 시행되도록 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외곽 지역에서 벌어진 저항들은 패배와 아픔으로 기억됐다. 승리의 전리물을 일부 얻는 싸움이 중앙정부가 위치한 곳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지역자치가 부재한 상황도 한 몫 한다. 또, 광주가 (지금은 비록 정체된 상황이지만) 기억 투쟁을 벌여온 과정이 있었기에 항쟁의 기억이 현재 사람들에게도 남을 수 있게 됐다. 보수의 중심 TK지역이 다시금 해방과 저항의 공간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역사 기억에 대한 자치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저항의 재구성이 필수다.
※참고문헌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2003,『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김영수, 2008, 『과거사 청산, ‘민주화’를 넘어 ‘사회화’로』, 도서출판 메이데이
김일수, 2004,「대구와 10월항쟁- 10.1사건을 보는 눈, 폭동에서 항쟁으로」
이성우, 2011,「국가폭력에 대한 기억투쟁: 5.18과 4.3 비교연구」
정해구, 2011,「해방 공간에서의 10월항쟁: 그 의미와 평가」
허상수, 2005「제주 4.3사건의 진상과 정부보고서의 성과와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