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최초의 레즈비언 선출직 공직자가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탄생했다.1전직 배우이자 변호사로 활동하던 실라 쿠엘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사회운동가로 활발하게 활약하던 캐럴 미그덴이 1997년에 의회에 입성한다. 1명은 2명이 되고 곧 4명으로 늘어난다. 재키 골드버그와 크리스틴 케호가 2000년에 의원이 된 것이다. 1대80은 2대80, 4대80으로 4배로 늘어난다.
그 과정에서 공립학교 내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시민결합’이 허용되고 마침내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세계최강 무력집단, 미군 내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고 마침내 <폴리티컬 애니멀>의 첫 시작을 장식하는, 2015년 6월 26일 미국 전체에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연방대법원의 판결 현장2과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연설로 ‘거대한 전환’의 일단계가 완료된다. 영화는 그렇게 인상적인 출발을 한다.
‘운동’과 ‘정치’의 바람직한 결합
(상영회 일자를 기준으로) 84일 후면 6.13 지방선거 투표일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제6공화국’이 탄생하고 이후 1997년 야당이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국회의원을 배출한 진보정당으로 민주노동당이 등장하면서 선거를 통한 집권이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운동권 분위기를 벗어나자’, ‘정치에는 타협이 필요하다’ VS ‘원칙을 지켜야 한다’, ‘정략적 야합은 망하는 길’이라는 끝없는 논쟁구도가 형성됐고, 그런 지형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런 해묵은 논쟁에 대해 <폴리티컬 애니멀>은 ‘운동’과 ‘정치’의 바람직한 결합에 대한 하나의 모범적 지점을 제시한다. (단, 이 영화는 성과를 회고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비판적 평가는 축소했을 수 있다)
영화 초반 30여 분은 정치 스릴러를 보듯이 박진감 있게 흘러간다. 공립학교 내에서 성적 취향을 이유로 혐오폭력을 당하는 현실을 타개하려고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는 선구자들은 2번 실패하고 3번째에서야 고지를 등정한다. 이 과정에서 단 1표를 더 얻어내기 위해 문구를 수정하는 논의를 거친다. 영화 속에선 생략됐지만, 현실정치와 법률 제정 과정에 조금이라도 관심 가진 이들이라면, 이 법안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며 치열하게 논쟁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주의원 80명 중 과반수인 41명의 찬성을 얻기 위해 이 선구적 ‘투사’들은 눈물을 훔치고 나름대로 ‘거래’도 하고 법안 지지를 망설이는 동료 의원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낸다. 그렇게 당시 2명의 레즈비언 의원은 한 걸음을 내디딘다.
의회 입법전술 : ‘크리스마스트리’ 꾸미기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하고, 의원은 1명에서 2명에서, 4명으로 확대된다. 그래봐야 4/80이다. 37명을 더 획득해야 성공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그녀들이 등정하려는 고지는 남녀 간 결합만이 ‘부부’로 인정되는 결혼제도에 대한 도전이다. ‘동성결혼’에 대한 보수적 기독교계의 거부감이 워낙 심하기에 이들은 “시민결합”이라는 보완적인 개념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그러나 반대편은 이들의 속내를 너무나 잘 안다. ‘동성결혼’ 허용하라는 주장 아니냐고. 그에 대해 그녀들이 펼치는 전술은 ‘사랑’을 인정하라는 감성적 접근과 함께 치밀한 ‘크리스마스트리’ 단계별 진전의 양날개론이다.
그렇게 3년 넘게 걸렸던 차별금지법에 비해 ‘시민결합’은 금방 통과된다. 다만 내용은 너무나 빈약하다. ‘시민결합’으로 보장되는 권리는 파트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방문권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무가 일단 마련되면 전구를 달아 가면 된다는 게 ‘크리스마스트리’ 전술의 요체이니 부실해 보이는 성과물은 보완하면 그만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상속권과 배우자의 고용보험 가입 허용 등 형형색색의 전구가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폴리티컬 애니멀’들이 비록 순간순간 부족해 보이지만 그녀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이들이 수면 위의 활동을 강화할수록 틈새는 점점 넓어지고 거부감은 완화된다. 그리고 성과의 축적은 결국 ‘동성결혼’ 법제화로 이어진다. 관객이 맨 처음 백악관의 오바마 연설,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는 문구를 듣게 되는 그 순간으로 이어지는 성과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폴리티컬 애니멀’들은 집단의 정체성 자체가 범죄시되는 단계는 일단 벗어났지만, 정체성을 이유로 물리적인 폭력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위협이 상존하는 단계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첫 단계가 직장과 학교, 가정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 사회적/제도적 보호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만든 차별금지법은 직장에서 부당한 해고를 당하거나 임대주택 입주 거부 등을 자연스레 차별로 인식하는 성과가 파생되었다.
이런 법적, 제도적 인정을 통해 성소수자들이 겪는 이중의 고난, 나의 지향과 정체성 때문에 주변인들, 가족이나 지인들까지 연좌제처럼 받는 차별이 서서히 ‘차별’로 인식되는 사회적 인식변화로 나아간다.
성소수자 커플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자녀들이 굴레를 벗어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됨을 ‘폴리티컬 애니멀’들은 꿰뚫어 보고 장구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영화의 4할 정도를 차지하는 박진감 넘치는 입법투쟁은 그런 원대한 계획을 하나씩 구현해낸 장대한 역사를 압축해 잘 보여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전반부의 주의회 연설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폴리티컬 애니멀’들의 저절로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만드는 발언들은 중반부에서 그녀들의 前史가 소개되면서 더욱 개연성을 확장한다. 반대파 혹은 중간에서 보수적 유권자들의 눈치를 살피는 동료 의원들에게 그녀들은 일갈한다. ‘이 문제는 저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쐐기를 박는다. 단지 소수의, 다만 일부의 문제인데 왜 굳이 끄집어내서 혼란을 만들려고 하느냐는 무사안일주의에 철퇴를 내려친다. ‘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중후반부에서 ‘폴리티컬 애니멀’들이 왜 이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가가 설명된다.
68혁명의 기운이, 하비 밀크의 시대3가, 히피 운동의 잔향이 넘실거린다. 모두들 각자의 다양한 체험과 사회운동을 거쳤고, ‘정치’의 필요성, ‘입법’ 가능성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들이 일생을 걸어온 운동의 ‘도구’로서, 그리고 그녀들 개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벽을 철폐하기 위한 일상의 싸움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채로운 사회운동 경험을 가진 ‘폴리티컬 애니멀’들은 연대의 정치를 펼쳐내 다양한 성소수자는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거대한 ‘연합’을 구성하는데 일정부분 성공한다. 풍부하고 교차하는 활동 경력이 없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서로 필요한 법안을 만드는데 협력하고 공동의 논의틀을 만드는 것은 때로는 남 좋은 일만 해주고 실속은 못 챙긴다거나 상호 간의 이해부족으로 파행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본 영화는 2015년 동성결혼 합법화의 기운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보니 그런 내부 갈등을 조명하는 데에선 다소 한계가 있지만,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과 시기를 본다면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뚝심있게 바늘귀 넓히기 또는 ‘우공이산’의 지혜
후반부에서 여전히 보수적 정치인들과 압력단체의 공세는 거듭 보여진다. 그러나 전반부에서 실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까지 느껴지는 비이성적인 주장과 모욕적 표현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수세에 놓인 이들의 위축과 초조함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보수적 유권자를 의식하던 동료 의원들은 점차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건, 설득에 의해 인식의 변화를 겪었건 적극적으로 ‘폴리티컬 애니멀’들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은 전형적인 ‘막대 구부리기’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폴리티컬 애니멀’은 말한다. 사회보장이나 공공의료 제도 역시 그런 식으로 시작되어 온 것이고 자신들은 그러한 운동의 기본전술과 원칙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르고 선거판에서 나중에 왜 저런 선택과 판단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해프닝을 벌이기 일쑤인 현재의 한국정치, 특히 전보정치운동의 지리멸렬한 현재를 보면, ‘긴 호흡’의 중요성과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유연함’의 조합이 얼마나 현실에서 어려운 문제인지 고개를 끄덕거려가며 선망의 눈으로 영화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부러울 만큼 <폴리티컬 애니멀>은 성과적인 부분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4명의 ‘폴리티컬 애니멀’들의 현재를 조명하며 마무리한다. 4명 모두 의회에서의 소임을 훌륭하게 마무리한 후 다시 운동으로 돌아갔거나 다른 정치의 장으로 옮겨서 ‘보편적’ 정치인으로서 성소수자 인권운동 외에도 행정과 교육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비록 ‘트럼프 왕국’이 되어버린 미국이지만 41/80을 넘어선 거대한 전환의 흐름을 되돌리긴 어려울 것이다. 차곡차곡 지역에서, 집단들이 쌓아 올린 ‘개인’들의 공동체, ‘정체성’의 연합이 탄탄하게 버텨내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 부침은 항상 있지만 사회 전체의 변화가 한번 이뤄지면 되돌리기 어려움을 오랜 운동경험과 함께 경험한 ‘폴리티컬 애니멀’들은 미래의 ‘폴리티컬 애니멀’들이 활약할 든든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왔음을, 그리고 다음 고지로 나아가기 위한 작전수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영화가 끝나는 순간, 관객들은 간접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 저렇게?’라는 선망과 질투는 ‘우리는 이제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변이되어야 한다.
작품정보
폴리티컬 애니멀 Political Animals |미국|2016|다큐멘터리|88‘
[감독] 조나 마코위츠 Jonah Markowitz, 트레이시 웨어즈 Tracy Wares
[출연] 재키 골드버그 Jackie Goldberg, 크리스틴 키호 Christine Kehoe, 셰일라 컬 Sheila Kuehl, 캐롤 믹던 Carole Migden
– 9회 DMZ국제다큐영화제(2017) 초청작
– 10회 여성인권영화제(2016) 초청작
상영회 안내
일시 : 2018년 3월 21일(수) 19:30
장소 :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중구 국채보상로 537 서울한양학원 빌딩 1층)
상영작 : 폴리티컬 애니멀 Political animals
주최 :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조직위원회
관람료 : 관람 전&후 자율후원, 관람인원 : 50명(사전신청 선착순)
※ 관람신청 및 문의 : 김상목 프로그래머 앞
– 손전화 : 010-8598-1324, 가급적 문자환영
– 전자메일 : spanishbombs@hanmail.net
– 신청서식 : “신청인(단체)/인원/연락처” 필수
- 최초의 게이 선출직 공직자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당선된 하비 밀크. 하비 밀크는 시의원에 당선되고 70년대 히피 문화운동의 영향 하에 동성애자 인권조례를 제정하는 등의 활약을 했으나 11개월 만에 샌프란시스코 시장 조지 모스코니와 함께 동료 시의원 댄 화이트에게 암살당한다. 그의 극적인 생애는 구스 반 산트 감독, 숀 펜 주연의 픽션 “밀크”와 과거 인권영화제 등에서 소개된 다큐멘터리 “하비 밀크의 생애”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 9명의 연방대법관 중 5명 찬성, 4명 반대라는 극적인 결과였다. 이 판결로 주정부 차원에서 동성결혼을 금지하던 10여개 주의 제도는 효력을 잃게 된다. 연방제인 미국에서 실질적인 법적 제도적 공식화된 차별에 마침표를 찍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하비 밀크에 대해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화는 “밀크”(2008)로, 한국에선 2010년 개봉했으며, dvd나 vod로 쉽게 볼 수 있다. 숀 펜의 열연으로 실제 인물과의 싱크로가 매우 높은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81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과 각본상 수상작.구스 반 산트 감독은 리버 피닉스의 “아이다호”나 우마 서먼의 “카우걸 블루스”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높은 작품들을 여러 편 만든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