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영화 <쓰리 빌보드>(한국 미개봉)의 한 장면. 두 남자가 바에서 당구를 친다. 한 남자가 쿠바에서 동성애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이야기 한다. 다른 한 남자가 의아해하며 “그래도 쿠바가 와이오밍은 아니잖아.”라고 한다.
쿠바는 60~70년대 거대한 정치적 혁명 속에서 동성애자를 수용소에 보낸 적이 있다. 훗날 피델 카스트로는 이에 대해 잘못을 인정했다. 또한 미국 와이오밍주의 라라미라는 지역에서는 1998년 동성애자인 대학생 매튜 세퍼드가 술집에서 만난 두 남성에게 가혹하게 고문당한 후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전자는 제도적 박해였다면 후자는 문화적 박해다. 누가 더 나쁜가 따지는 것은 공허하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증오범죄 예방 법안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든 계기였다.
1890년 미국의 44번째 주가 된 와이오밍은 ‘거친’ 이미지가 가득한 미국 서부에서 로키산맥을 품고 있는 주다. 땅의 융기로 이루어진 이곳 지형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 옐로스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빅혼산맥을 넘다가 살아있음에 감사할 정도로 아름다움에 경도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 속에는 그만큼 모순된 이야기도 있는 법이다.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고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격이 강하며 황소를 제압하는 로데오 경기가 유명한 와이오밍은 통념적인 남성적 이미지가 넘친다. 카우보이모자와 금속이 박힌 부츠에 청바지는 기본적인 패션 품목이다. 어쩐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젊은 시절 이미지가 잘 어울릴 듯한 장소다.
실제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서부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1881년 와이오밍을 배경으로 한다. 카우보이가 성매수 도중 여성의 얼굴을 칼로 그어 흉하게 만든 사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여자가 자신의 성기를 보고 웃었다는 이유였다. 사건을 맡은 보안관은 가해자들이 원래 악당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온 성실한 사람들이라며 풀어준다. (21세기 한국에서도 많이 보는 상황이다)
대신 가해자들의 말 몇 필을 술집 주인에게 주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성판매 여성은 술집 주인의 소유물이기에 술집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죄 정도로 보았다. 이에 분노한 성판매 여성들은 현상금을 내걸고 가해자를 죽일 사람을 찾는다. 아무리 남자들이 우리 위에 올라탄다고 해도 우리가 말은 아니라며.
이처럼 와이오밍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대체로 거칠다. <셰인>, <윈드 리버>, <헤이트풀 8>, <브로크백 마운틴> 등이 있다. 주로 척박하고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그려진다. 그러나 놀랍게도 와이오밍의 별명은 ‘평등의 주’다. 여성이 처음부터 남성과 똑같이 참정권을 가졌으며 1924년에는 넬리 테일로 로스가 미국 최초의 여성 주지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기영의 문학과 제주, 전혁림의 회화와 통영처럼 장소와의 관계를 창작 속에 풀어내는 작가들이 있다. 작가의 개인적 삶만큼이나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그가 태어나 살아가는 장소의 지리적, 정치적 환경이다. 잭 런던은 알래스카에 갔던 경험으로 <야성의 부름>을 쓸 수 있었다.
동계 올림픽을 막 치른 평창을 9월에 방문하면 달밤 아래의 경치가 정말 이효석이 표현한 대로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이 평창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과연 <메밀꽃 필 무렵>을 쓸 수 있었을까. 세잔이 그린 ‘생 빅투아르의 산’과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다른 이유는 재료와 기법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다. 산, 그 자체가 이미 다르다. 몸이 ‘나’라는 사람과 별개가 아니듯, 장소의 지역성은 작가들의 창작에 침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각각의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주변의 흙, 바다, 돌과 연결된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다.
와이오밍이라는 거친 지역을 문학의 세계에서 새롭게 빚은 작가가 애니 프루Annie Proulx다. 그의 작품은 북미의 시골 지역을 배경으로 농부, 목장 경영인, 일용직 노동자, 자영업자들의 근근한 삶을 다룬다. 프루의 소설 속 남성 인물들은 대체로 말을 타듯이 여자들을 탈 궁리로 가득하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그들은 경제적으로 뒤처지고 문화적으로 소외된다. 그의 소설에서는 붉은 흙냄새와 건초, 짐승의 배설물이 뒤섞인 냄새가 난다. 인물들은 낙후된 고향을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거나 어렵게 도시로 나갔다가도 매번 다시 돌아오곤 한다. 삶이 황폐해진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지만 사회적으로 실패한 인생들이 대부분이다.
애니 프루는 미국 북동부 버몬트주에서 30년 이상 살았다. 캐나다와 미국의 접경 지역에 살았던 경험을 지니고 있고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피가 흐르는 그는 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다룬다. 주인공들은 주로 지역을 옮기면서 삶을 개선해보려 한다. 불운이 지속하는 삶이지만 뭔가를 찾아 계속 떠날 수밖에 없는 여정 속에 있다. 잘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에게 애니 프루는 관심이 많아 보인다.
2016년에 출간된 <바크스킨Barkskin>도 백인 사회 속에서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인물의 부대낌을 다룬다. ‘바크스킨’은 나무껍질 같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다. 프루는 이 소설이 숲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숲은 사람들의 삶과 모두 연결된 이야기보따리이다. 그에게 자연은 언제나 중요한 소재다. 퓰리처상을 안겨준 <시핑뉴스>(1993년)는 뉴욕주의 시골에서 일도 사랑도 실패한 별 볼 일 없는 주인공이 아내의 죽음 이후 고향인 캐나다의 뉴펀들랜드로 이주하며 거친 바다를 마주한 채 새롭게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갖기보다, 삶의 고통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끌어안는 자세를 배워간다.
현재는 북서부의 시애틀에 거주하지만 프루는 오랫동안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주와 미국의 와이오밍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94년 그는 와이오밍의 사라토가로 이사를 온다. 그렇게 그의 ‘와이오밍 이야기’ 시리즈가 시작된다. 1999년에 출간된 단편집 <Close Range: Wyoming Stories>는 국내에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1편의 단편으로 묶인 이 책에 실린 ‘브로크백 마운틴’ 편은 1997년 ‘뉴요커’에 처음 발표되었다. 이안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1998년에 라라미에서 벌어진 사건을 생각하면 이 와이오밍을 배경으로 두 남성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쓴 애니 프루의 상상력이 소름 끼칠 정도다.
잡지 언론인으로 일하던 애니 프루가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활동한 시기는 50대에 들어서다. 53세인 1988년에 첫 번째 소설집을 출간한다. 본명은 이드나 앤 프루Edna Ann Proulx이며 애니라는 그의 이름은 엄마의 이모 이름에서 따왔다. 작년 가을 전미도서재단의 평생공로상을 받은 애니 프루는 수상 소감에서 오늘날을 ‘카프카적인 시대’라고 말하며 입을 열었다. 암울하며 모순으로 가득찬 부조리의 시대라는 뜻이다. 믿고 싶은 가짜뉴스를 신뢰하며, 불리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소외와 차별의 역사에 일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폭력에 무디어지고 있다. 이 모순의 시대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얼마 전 필라델피아의 미국독립혁명박물관에서 남북전쟁 당시 사용된 북을 보았다. 보통 40명 중 한 명은 이 북을 담당했다고 한다.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병사들의 기상과 휴식 등을 알리기 위해 전투에서 북과 피리 같은 악기는 항상 있었다. 내가 본 북에는 당시 병사가 남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곧 자신이 죽을지 모르는 그 전장에서 병사는 잠깐의 휴식시간에 북 위에 낙서를 하며 간신히 자신의 인간성을 유지했을 것이다.
애니 프루의 말대로 실로 우리는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카프카적인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여자의 몸을 깔고 앉아 예술을 읊조리는 후안무치의 예술가연 하는 인간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냉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어야 한다. 매번 망하지만, 매번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와이오밍의 한 가족사를 다룬 애니 프루의 단편 ‘어느 가족의 이력서’처럼. 전쟁 속에서도 북 위에 그림을 그리는 병사의 심정으로, 스스로의 품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치열함은 시간을 뚫고 살아남는다. 예술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