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경찰서(서장 류영만)에서 데이트폭력 피해 수사 중 경찰에 의한 인권침해 논란이 불거지자 이준섭 대구지방경찰청장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경찰은 대구 10개 경찰서 모두에 문제가 된 조사실 공간분리를 추진하기로 했다. 시민단체는 ‘직권경고’ 조치에 그친 담당 수사관과 인권침해 문제 제기를 회피한 청문감사관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고 나섰다.
데이트폭력 신고하러 갔더니…진술 중 다른 경찰 들락날락
“젊은데 더 좋은 남자 만나면 되는 거 아니냐” 망언도
지난달 2일, 데이트폭력 신고를 위해 대구수성경찰서를 찾은 30대 여성 A 씨는 40여 분 만에 경찰서를 뛰쳐나왔다.
민원실 안내를 받고 여성청소년과에 도착한 A 씨는 여성 경찰관인 B 수사관의 안내를 받고도 쉽게 자리에 앉지 못했다. 여성청소년과 소속 경찰들이 간식을 먹으며 어수선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다른 상담실로 자리를 옮겨 진술을 시작했지만,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다른 경찰이 수차례 들락날락했다. B 수사관은 A 씨의 동의도 얻지 않고 사진을 찍겠다며 들어오는 이들의 출입을 허락했다. B 수사관은 개인적 업무로 추정되는 전화도 받았다.
A 씨 사건을 위임받은 인권운동연대에 따르면, B 수사관은 “목소리가 작아서 고소할 수 있겠냐”, “고소하면 관계가 계속 이어질텐데, 정말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것 맞냐”, “젊은데 더 좋은 남자 만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등 인권 침해적인 질문도 했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지속되자 A 씨는 결국 경찰서를 뛰쳐 나왔다. 해당 상담 장소는 상담실, 진술녹화실, 신상정보등록 사진촬영 장소 등 공용공간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경찰청 훈령 ‘성폭력범죄 수사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경찰은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하여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조사하고, 공개된 장소에서의 조사로 인해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청문감사관에 문제 제기했지만 일주일 동안 연락 회피
잘못 사과한 경찰, 담당 수사관 ‘직권경고’에 그쳐
A 씨는 2일 당일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하고, 10일 인권운동연대에 사건을 진정했다. 사건을 위임받은 인권운동연대는 17일 B 수사관의 인권침해 등에 대한 진정과 징계 요구서를 청문감사관에게 접수했다.
담당 청문감사관은 B 수사관 진정 사건을 위해 A 씨가 직접 진술을 해야 한다고 한 차례 알려온 후, 일주일 동안 연락이 없었다. 일주일 사이 인권운동연대는 두 차례 전화 메모와 정보관 등을 통해 연락을 요청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자 결국 류영만 수성경찰서장에 공문을 보내 면담을 요청했다. 인권운동연대는 그제야 담당 청문감사관에게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사무국장(대구시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서장에게 면담을 요청하자 그제야 청문감사관이 연락이 왔다. 청문감사관이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수성경찰서는 “상담 중 부적절한 언행, 사적인 통화, 상담 장소에서 제3자를 출입하게 함으로써 당사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및 수치심을 느낄 소지가 다분했던 점을 확인했다. 위로와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며 “상담 장소가 공용 공간으로 사용되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인권운동연대에 12일 밝혔다.
수성경찰서는 재발 방지 대책으로 해당 상담 장소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별도의 분리된 공간을 마련했다. 또, 모든 경찰관에인권교육을 강화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B 수사관은 타부서로 전출하고, ‘직권경고’ 조치하는 데 그쳤다.
이준섭 대구경찰청장, “잘못 인정…엄격히 조사 후 문책”
대구 내 10개 경찰서 상담실 공간 분리 지시
여성단체, “경찰 내 2차 피해 심각한 문제”
인권운동연대,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은 B 수사관에 대한 ‘직권경고’ 조치가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지적하며, B 수사관과 담당 청문감사관에 대한 징계, 재발 방지 대책을 대구지방경찰청에 요구했다.
13일 오전 10시, 이준섭 대구경찰청장은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사무국장, 강혜숙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대표와 한 면담에서 “이유를 막론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드린다”며 “상담자의 인권 문제는 소중한 것인데, 현장에서 잘못한 것이 맞다”고 사과했다.
이어 이준섭 서장은 “10개 경찰서에 공간 분리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며 “담당 수사관, 청문감사관, 이후 조치 결과까지 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조사해서 조취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강혜숙 대표는 “성폭력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2차 피해는 이미 심각하다. 경찰의 경찰인 청문감사관까지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것은 경찰에 대한 신뢰 하락뿐 아니라 경찰의 기강이 무너진 문제”라며 “모든 경찰서 시설 점검과 함께 성인지적 인권 교육 강화, 가해 당사자의 강력한 징계를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A 씨는 지난해 12월 중순, 당시 만나던 연인에게 헤어지자고 하자 그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수차례 받았다. 당시 연인 C 씨는 A 씨의 속옷, 신체 일부 등이 찍힌 사진을 A 씨와 지인들에게 보내면서 계속해서 만나달라고 요구해 경찰에 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