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늦은 저녁이 되어 교도소로 넘어갔다. 이렇게 늦게 교도소로 넘어가는 일은 일상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교도소 보안과에 달린 한 방에서 푸른색 재소자복으로 갈아입었다. 교도관들이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며 챙겨놓았던 밥을 내어주었다. 가다밥이라고 했다.
가다밥은 어깨란 뜻을 가진 일본어 ‘가다’와 한국어 밥의 합성어다. 틀로 찍어놓아 형태가 만들어진 밥을 의미한다. 매주콩이라고 하는 흰콩이 섞여 있는 보리밥이었다. 이것이 교도소에 오면 먹어야 하는 ‘콩밥’이었다. 밥을 먹은 후 3명은 각자 교도관을 따라 정해진 방으로 갔다. 예상했던 독방은 아니었다. 나는 공무원 방이라고 불리는 1상 19호실로 갔다. 주로 공무원 신분의 사람들이 비리와 교통사고 등의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된 방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누군가가 밥은 먹었느냐며 물어왔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나를 위해 밥을 따로 차려놨다고 했다.
그러고는 소위 ‘신고식’같은 것도 없이 자리를 정해주더니 자라고 했다. 복도 쪽 창문 바로 아래였다. 초짜는 뺑끼통이라 불리는 화장실 옆에 재운다던데 그렇지 않았다. 뺑끼통은 예전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이 통 위에 판자 두 개를 받쳐놓고 화장실처럼 사용한 것이 유래가 돼 지금의 화장실도 계속 뺑끼통으로 불렸다.
건물 구조는 2층이었는데, 중앙 복도가 있고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쭉 있었고 층마다 약 스물다섯 개 정도의 방이 있었다. 그렇게 4개의 사동이 있었다. 방은 네 평 남짓한 정사각형에 가깝고 따로 삐져나간 형태로 화장실이 있는 구조였다.
아마 당시에는 정치범에 대한 교화를 목적으로 했는지 독방에 가두지 않고 소위 ‘혼거방’이라는 여러 사람이 같이 있는 곳에 가두었다. 소위 범털들이 많은 경제사범이 있는 방과 공무원 방, 교통사고로 들어온 사람들의 방에 수용했다. 3일쯤 지나서 알게 되었지만, 내가 누워 잔 자리는 ‘정리원’이라고 부르는 감방장 자리였다. 창문 밑이라 누워있어도 복도 쪽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기에 누워있어도 괜찮은 자리여서 감방장 자리인 것이었다.
교도소에서 사전에 이야기해놓았던 것 같았다. 그것을 알게 된 나는 미안해서 방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간자리로 옮겨왔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앉아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누워있어도 교도관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본래 낮에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누워있으면 교도관들도 못 본 척했다. 방 안 사람들도 나를 따라서 편하게 자세를 취했지만, 그 또한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만 놔두고 다른 이들을 뭐하고 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한숨도 자지 못한 4박 5일간 조사 때문인지 한 석 달간 머리가 멍했다. 생각이 정리되지를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얼마의 날짜가 지나자 검찰 취조가 시작됐다. 교도소에서 이동해 검찰청과 법원이 있는 곳의 노고지리통이라고 하는 수용시설에서 대기하다가 검사가 부르면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재판받을 때도 대기하는 방이었다.
우리를 담당한 검사는 특수부 소속 공안검사 장재였다. 현행범인데다가 사건 자체를 인정하고 있기에 따로 보강해서 수사할 것은 없어 보였다. 검찰 조사는 거의 없었다. 검사의 목적은 수사보다는 다른 곳에 있는 듯 보였다.
바로 우리에게 반성문을 요구하고 그것을 받는 것이었다. 반성문을 쓰면 내보내주겠다고 꼬드겼다. 나중에는 반성문이라는 명칭이 싫으면 진술서 같은 제목으로 써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반성문을 쓰고 나가게 되면 당초 목적했던 바가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안타깝지만 우리는 전혀 그분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2명은 반성문을 쓸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선배는 검사에게 불러달라고 했다. 검사는 혹시나 반성문을 쓸까 해서 열심히 불러주었다. 그렇게 그 선배는 맥콜도 얻어먹고 담배도 얻어 피고는 그냥 헛소리만 하다가 교도소로 돌아오곤 했다. 반성문을 쓸 생각도 없으면서 바깥바람을 쐬고 싶으면 검사를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너덧 번을 바람 쐬러 나가더니만 그런 의도를 검사도 눈치챘는지 더는 부르지 않았다.
정말 악질이었다. 검사 말고 선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