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루프타핑 추락사, 기술사회 책임은 없는가?

기술사회와 책임의 원칙에 관하여

12:47

[=격주 수요일마다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를 연재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테크놀로지의 폭주는 우리의 삶을 뿌리째 바꾸고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고, SF가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 기술산업문명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경 속에서 대안과 전환을 모색해 봅니다. ]

몇 달 전, 루프타핑을 하던 중국의 한 인터넷스타가 높은 빌딩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 ‘루프타핑(rooftopping)’, 안전장비 없이 고층건물에서 맨몸으로 오르고 매달리거나 건너는 행위를 일컫는다. 사망한 지 한 달쯤 지나서 중국 언론에 공개된 26살 청년, 우융닝(吳咏寧)의 추락 장면은 소셜미디어(소셜네트워크,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선정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상상하는 것조차 힘겨운 우융닝의 마지막 모습은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플랫폼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위험천만한 모험을 즐기던 한 청년의 허무한 죽음쯤으로 단정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이 사건 뒤에는 극단의 관음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인터넷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만들고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은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내용으로도 방송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진입장벽이 낮아진 만큼 경쟁은 치열해졌다. 대중은 점점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원했다. 이 세계에서 죄는 악이 아니라 평범함이다.

인터넷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돈이 따라붙었다. 조회수나 팔로워수가 늘수록 더 높은 수익이 보장됐다. 우융닝의 이번 도전에는 10만 위안(약 1600만 원) 상당의 스폰서 상금이 걸려 있었다. 가난했다던 그는 결혼 자금과 어머니 치료비로 사용할 예정이었던 상금을 위해 추락 직전까지 62층 빌딩 꼭대기에 외롭게 매달려 있어야 했다. 그와 마지막을 함께한 것은 건너편 건물에 자신이 설치한 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더 위험할수록, 죽음의 세계에 더 가까울수록 더 많은 돈을 지불해왔던 스폰서 기업들은 그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인터넷에 올린 한 장의 사진,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지난해 방영된 미국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원제: 13 Resons Why)는 한 여학생의 비극적인 자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는 주인공 해나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재구성하며 전개된다. 이 시기 청춘들이 의도치 않게 겪는 좌절과 고통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드라마가 미디어를 바라보는 관점과 방식에 있다. 해나의 비극은 그녀를 담은 사진 한 장이 소셜미디어에 올라가면서 시작됐다. 그녀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찍힌 이 한 장의 사진은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덧씌워져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진실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거짓 껍데기만 남은 사진 한 장으로 해나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나비의 날갯짓이 결국 정반대 지점에서 폭풍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처럼 말이다.

해나는 자살을 감행하기 직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관계와 상황, 그 원인을 추적하고 기록한다. 그런데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뜻밖에도, 지난 198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소니의 워크맨 카세트였다. 해나는 워크맨으로 자신에게 순식간에 일어난 비극적 상황들을 차근차근 재구성하고 하나하나 기록한다. 워크맨은 그녀의 부모 세대가 청춘의 시기를 통과하던 시절에 가장 긴요하게 사용했던 아날로그 방식의 기기였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주인공 해나

그렇다면 해나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왜 이 같은 철 지난 방식을 선택했던 것일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한 사람의 운명을 한순간에 결정지어 버린다. 디지털 세상에서 한번 각인된 한 사람에 대한 평판은 쉽게 원상복구되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이 같은 비운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극단적 선택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어떠한 대처도, 혹은 소명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 물결에 다가설수록 그녀는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해나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필요함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진실을 삼켜버린 디지털 세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진실을 되돌릴 아날로그 방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해나는 자신을 비극으로 이끈 모든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랐다. A면의 테이프를 꺼내서 돌려 집어넣어야만 B면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워크맨처럼, 자신을 소명하는 과정과 절차가 무시당하지 않기를 원했다. 이 과정에서 아날로그의 제약과 한계가 오히려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는 훨씬 적합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진실이 담긴 녹음테이프는 그녀가 지목한 사람들에게 전달돼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 매우 유효하게 사용됐다.

극화된 드라마 한 편으로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지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루머의 루머의 루머> 주인공 해나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 청소년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누구와도 연결할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확장했지만,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앗아가 버렸다.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철저한 고립을 감수해야만 한다. 특히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세대)에 해당하는 지금 세대의 청소년들에게 (일시적 시기의 특정한 목적을 제외하고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차단하라는 것은 숲속으로 들어가 홀로 은둔 생활을 하라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결국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을 권리는 좀처럼 현실에서 지켜지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소셜미디어, 인간사회를 파괴하는 도구?

미국자살예방재단 연구팀은 2009년부터 2015년 사이 미국 청소년 50만 명을 대상으로 자살과 소셜미디어와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하루 5시간 이상 사용하는 청소년 응답자가 2009년 8%에서 2015년 19%로 2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집단은 하루 1시간 정도 사용하는 집단보다 자살을 생각하거나 행동으로 옮길 확률이 70%가량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청소년들 대부분은 소셜미디어에 접속한다. 소셜미디어에서 일어나는 따돌림이나 폭력은 청소년들에게 치명적인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비단 사이버폭력뿐만 아니라 과잉 몰입으로 인한 각종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셜미디어에 몰입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불안과 혼란은 가중되며 극단적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사이버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청소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다.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지만,폭력은 근절되지 않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청소년들의 숫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이른바 ‘SNS저격’으로 고통받던 전주의 여중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사건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해마다 같은 유형의 비극이 근절되지 않고 반복된다.

피해자들의 삶을 멍들게 하고 뿌리째 망가뜨리는 극악한 디지털 범죄도 계속되고 있다. 하루에 20건이 넘게 일어난다는 ‘몰래카메라’ 범죄나 가해자 자신도 치명적인 고통을 받아야 하는 ‘단체대화방 성폭력 사건’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도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지난해 현직 판사에 의해 저질러진 지하철 몰카 사건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더욱 당황스러운 점은 범죄를 저지른 판사가 고작 벌금 300만 원에 약식기소 되었다는 것과 지금도 재판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같은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흔히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윤리, 규범, 태도만을 문제 삼는다. 물론 이를 두고 잘못된 접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이 지닌 속성 자체에 문제의 근원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최근 주목할 만한 견해가 나왔다. 세계 최대 소셜미디어 업체 페이스북에 입사해서 사용자 담당 부사장의 자리까지 올랐던 차마스 팔리하피티야는 지난해 11월 스탠포드 대학교 강연에서, 페이스북을 두고 “우리는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괴하는 도구를 만들었다”고 고백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는 페이스북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페이스북이 사용자의 도파민(도박이나 마약 등 중독성이 강한 작용에서 분비되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분출을 유인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며, 소셜미디어에 의해 프로그램화되어 가는 사용자들에게 “소셜미디어를 중단하라”고까지 권고했다.

팔리하피티야에 앞서, 페이스북 창립 멤버였던 션 파커에 의해서도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이 제기되었다. 파커는 현 페이스북 CEO인 마크 저커버그와 함께 페이스북을 공동 창업하여 초대 사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파커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인터넷 매체 행사에서 소셜미디어가 인간 심리의 취약성을 이용하는 구조라고 폭로했다. 그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 어플리케이션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용자의 시간과 관심을 최대한 소비할 수 있을까에 맞춰져 있으며 그렇게 하려고 사용자에게 ‘좋아요’ 클릭이나 ‘답글’ 달기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도파민을 분비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파커는 “당시 우리는 사람들이 중독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고백함으로써 페이스북의 폭발적 성장 배경에는 사용자에 대한 심리적 유인책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월간 사용자가 20억 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이는 75억 명으로 추정되는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넘어선 통계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하루 8억 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있고, 1억 7500만 명의 사람들이 ‘최고예요’ 버튼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저커버그는 이에 대해 한껏 고무된 목소리로 “우리는 세계를 연결하는 과정에 있으며, 서로가 더 가까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페이스북과 저커버그는, 팔리하피티야나 파커와 같은 그의 옛 동료들조차 “인간사회를 파괴하는 도구”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소셜미디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성찰과 대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문제 제기를 일축하면서, 페이스북이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그 사이 페이스북은 점점 더 거대한 비즈니스의 용광로가 되어 가고 있다.

기술사회와 책임의 원칙

독일의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현대과학기술이 윤리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결과의 모호성’, ‘적용의 강제성’, ‘시공간적 광역성’을 근거로 들어 제시한 바 있다. 현대과학기술은 그 자체의 속성상 아무리 선하고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요소가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다른 분야의 능력이나 지식과 달리 끊임없이 적용을 강요받게 되며, 시간적으로는 미래 세대에, 공간적으로는 지구 전역에 막대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드시 윤리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기술 의학 윤리』, 이유택 옮김, 솔출판사)

요나스의 이 같은 생각은 오늘날과 같은 첨단기술 시대에 더욱 분명한 ‘책임의 원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기술의 폭주는 요나스가 제시했던 윤리적 성찰 기준을 훌쩍 뛰어넘어, 더 이상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상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다수 기술낙관론자들은 여전히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을 앵무새처럼 떠들어대기만 한다. 그들은 과학기술의 결과로,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생명의 세계에 예기치 않은 재앙이 찾아오더라도 이는 과학기술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을 한결같이 강조한다. 과학기술은 가치 판단에 관여하지 않고 객관적 진리만을 추구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객관적이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과학기술이 마땅히 담당해야 하는 ‘책임’과 ‘윤리’를 회피하고자 하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본래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객관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과학기술의 작동 원리는 이제 더 이상 자연에 대한 객관적 탐구 정신에 입각하여 설명될 수 없다. 현대과학기술을 추동하는 힘은 명백히 자본에서 나오며 그 결과도 자본으로 귀속된다. 한발 더 나아가 자크 엘륄이 심각하게 우려했던 것처럼, 기술은 인간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서 자율적 대상 심지어 자율적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요나스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 생태학적 윤리』(이진우 옮김, 서광사)에서 줄곧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의 윤리적 책임에 관한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여 여러 형태로 존재하는 유토피아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유토피아의 극단적 가능성들을 전망해 볼 때, 유토피아 비판은 이미 그 자체 속에 기술 비판을 수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토피아는 필연적으로 기술전체주의로 귀결되며 이는 과학기술이 윤리적 성찰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기술사회가 꿈꾸는 이상적 세계(테크노피아)는, 유토피아라는 말의 어원처럼, ‘아무 데도 없는 곳’, 즉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한다고 믿더라도 그곳은 더 이상 인간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조화로운 생명의 세계는 아닐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상상력은 허황한 테크노피아가 아니라 책임과 윤리로 복원하는 희망의 세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