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톨릭대학병원을 ‘우리 병원’이라 부르고 싶은 560명

눈물과 희망이 공존한 대가대병원노조 출범식

19:03

혹여나 부서 회식이 잡힐까 조마조마했다. 데이(아침, 점심) 근무를 마치고 바로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로 향했다. 아직 1시간 정도 남았다. 풍선을 불고, 김밥을 나르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맨 뒷줄에 앉았다.

공진솔(가명)은 올해로 6년 차 간호사다. 12월 27일은 대구가톨릭대학병원 노조가 출범하는 날이다. 진솔은 올해로 2년 차인 후배 간호사, 16년 차인 선배 간호사와 함께 노조 출범식에 왔다. 노조 가입 명부에 적힌 자기 이름에 서명하고, 출범식 리플렛과 김밥을 받아 들고 앉았다. 불과 2주 전까지 노조가 생길까 걱정하던 게 현실이 됐다. 세 간호사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너무 기대되고, 너무 설레요, 지금”
“처음에는 이러다가 괜히 위에 찍히는 거 아닌가 했어요. 실명방에 들어가서 다른 선생님들과 얘기해보니 다들 의지가 확고한 거예요. 그래서 더 안심했죠”
“요즘 병원에서 뭐 많이 물어보거든요. 보여주기식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좀 달라졌어요”

저녁 6시가 가까워지자 노조 출범식이 열리는 대강당이 북적였다. 이름과 부서가 적힌 명찰을 단 조합원들이다. 늦게 도착한 조합원들은 앉을 곳이 없어 의자를 날랐다. 간호처, 영상의학과, 핵의학과, 원무과, 회계학과…

진솔과 동료들은 긴 노조 이름 외우기를 시작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대구지역지부,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분회’. 조합원 숫자만큼이나 많은 글자 수다. 생전 처음 팔뚝질을 배웠다. ‘투쟁-’ 소리도 질렀다.

진솔 옆자리로 비슷한 연배 간호사들이 앉았다. 이주빈(가명)도 올해로 6년 차 간호사다. 신규 입사할 때부터 ‘가톨릭 병원’이라서 노조가 없는 게 당연하다고 들었다. 후배들이 물어도 그렇게 대답했다. 11월 말, SNS에 병원 문제가 폭로되고 언론에 보도가 나오면서 카카오톡 익명 채팅방에서 노조 얘기가 나왔다. 모두 숨죽이고 있었구나. 노조 가입을 위한 실명 채팅방이 생겼다. 실명방에 소위 ‘프락치’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 ‘진짜 실명방’이 다시 생겼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만 초대해 노조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정보를 교환했다.

“우리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일단 변화를 시켜보자고 생각했어요. 거의 모든 걸 참아왔죠. 임신한 동료가 입덧 때문에 구토해가면서, 수액을 맞아가면서 일을 했어요. 임신 초기에 제일 힘들잖아요. 안 좋은 상태로 일을 하는 게 동료들에게 피해가 될 거 같아서 쉬겠다고 말하는데, 그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거. 정말 마음이 아파요”

노동조합이 생기면 임신 중 야간 근무를 못 하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 내 월급이 어떻게 계산되는지 알 수 있겠지. 못 받은 연차수당도 돌려주겠지. 쉬는 날 병원 행사에 불려 나오지 않아도 되겠지. 노조 생기면 우리가 일하기 좋은 병원이 되겠지. 동료들이 사직서 내려고 줄 서지 않아도 되겠지. 후배들이 묻는 말에 ‘원래 그렇다’고 하지 않아도 되겠지. 더 당당해질 수 있겠지.

▲송명희 분회장(오른쪽)과 김미화 수석부분회장(왼쪽)

오늘 분회장이 된 송명희(33)는 수술실 간호사다. 올해 12년 차로 병원을 그만둘 참이었다. 수술실에만 있다 보니 병원 소식도 항상 늦었다. 익명 채팅방, 실명방에 모이는 동료들을 만나면서 다른 부서도 정말 힘들구나 싶었다. 사실 노조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근로기준법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까마득했다.

명희는 서로 힘들어하며 일하는 것도 싫고, 힘들어하는 동료를 보는 게 괴로웠다. 노조가 생긴다는 소식에 당장 가입부터 하고 실명방에 입장했다. 출범식 직전까지만 해도 분회장이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 노조가 생긴다는 소식에 정말 기뻤어요. 제가 뭘 할 수 있다는 거 보다, 우리에게 좋은 길이 생길 수 있겠구나. 사실 저는 수술실에 있다 보니 소식도 늦고, 다른 선생님들이 더 잘 아세요. 제가 잘나서 분회장이 된 게 아니라, 다 같이 해주시는 선생님들 믿고 저도 나섰어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잖아요. 말 안 해도 다들 힘드니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모였지 않겠어요.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우고, 팔뚝질을 배우고, 노조 집행부 선출도 끝났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노조미’가 뿜뿜 흐르는 거 같다. 여전히 소리만 크고 멋없는 ‘투쟁’ 구호가 어색하지만, 온몸이 뜨겁다. 공공운수노조에 속한 노조에서 축하 영상을 보내왔다. 그들이 동지라고 한다.

김태형(가명, 간호사)이 당차게 무대 위로 올라왔다. 입사 초기 흉부외과에서 일했던 그는 수술 중 교수들로부터 ‘돌대가리’라는 말을 들었다. 견디다 못해 근무지를 옮겼다. 옮긴 근무지에서는 6kg에 달하는 납옷을 입고 근무 중이다. 없던 허리통증이 생겼다. 그나마 올해 초 후배 간호사 2명이 들어와 나아졌다. 그런데 마음은 더 불편해졌다. 시간당 임금을 묻는 후배에게 “그런 거 몰라도 된다”고 답해 버렸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 질문이다. 부끄러웠다. 화가 났다.

“저는 오늘부터 후배 앞에서, 그리고 제 자신에게 부끄럽워지고 싶지 않습니다. 후배 간호사들이 저와 같은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대우 때문에 이직을 생각하면서 일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투명한 인사규정, 임금규정 보여줄 수 있도록 노조 가입하자고 당당하게 말했던 제가 이제는 자랑스럽습니다”

노조에 가입한 것 만으로도 자신감이 생긴 거 같다. 남들 다 있는 노조지만, 이걸 만들기까지 20년이 더 걸렸다. 20년 넘게 숨죽였던 목소리가 불과 한달새 폭발했다. 노조 가입을 시작한지 열흘 만에 500명이 넘게 가입했으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조합원들이 차례로 올라와 자유발언을 했다. 지난겨울 촛불집회 때가 이랬던가. 병원에서 29년을 일한 원무과 조합원 한현민(가명)이 무대에 올라왔다. 현민은 12월 31일이면 명예퇴직한다. 남은 5일이라도 노동조합을 하고 싶었다. 인생의 마지막 노동조합이다.

“제가 병원에서 29년간 근무하면서 당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핍박과 억압으로 우리를 힘들게 했고, 사지로 몰아가 운명을 달리한 동료도 있습니다. 평생을 몸담아온 직장을 불명예스럽게 떠나게 하고, 또 이 직장에 몸담은 사실 자체를 부끄럽게 합니다. 후배들은 미래가 없는 고통 속에서 직장 아닌 직장 생활을 합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연히 일어섰고, 인류의 역사가 그래왔듯이 우리는 이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 노동의 대가가 멋진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노조가 출범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는 현민의 자신감에 환호 소리가 커진다. 당장 28일부터 병원에 교섭 요청 공문을 보낸다. 원장 신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병원은 어떤 분위기일까.

태형이 마지막에 한 얘기가 머릿속에 맴돈다. 아기 예수가 처음 세상에 왔을 때 울음으로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고 한다. 우리도 울음으로 노조를 통해 우리의 존재를 알리자고. 이제 바보처럼 살지 말자고. 이제 당당히 살자고. 벌써 출근이 기대된다.

인사하러 올라온 간부들 가운데 한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 대가대병원을 ‘우리 병원’이라고 자신 있게 아무도 못 합니다. ‘이 병원’이라고 합니다. ‘이 병원’이 그렇지. (웃음) ‘이 병원’이 아니고 ‘우리 병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겠지만 ‘이 병원’ 말고 ‘우리 병원’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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