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백화점의 미화원을 모집하는 광고에는 이런 후크(hook) 문구가 있다. “깨끗한 근무환경”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구인광고의 문구 중에서도 ‘깨끗한 근무환경’이란 조건에 낚였다고 고백들을 한다. 아무라도 백화점에 한두 번 다녀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보니, 고객으로 갔을 때의 그 깨끗한 환경을 머릿속에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치우지 않고서야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백화점이 깨끗할 리 없다. 그리고 이런 논리대로라면 누군가 ~하기에 다른 누군가가 ~한다는 공식이 성립한다. 이 공식은 그 쓰임에 따라 무한히 긍정적이거나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필이면 부정적인 예들이 먼저 떠오른다.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더욱 진부한 예들. 맥 빠지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들…
29.
미용사들 눈에는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맨 먼저 들어온다. 지금까지 내가 다녔던 미장원장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화원들 눈에는 청소할 곳만 도드라진다. 거기가 어디든, 심지어 청소도구가 있으면 직접 나서서 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자기가 잘하는 일이니만큼 웬만큼 깨끗한 것은 성에 차지도 않는다.
낡은 집으로 이사했던 S 언니가 그런 경우다. 사람을 사서 집을 치우자니 돈이 아까웠던지, 언니의 남편은 둘이서 그냥 청소하고 말자더란다. 나가서 돈벌이로 하는 일을 들어와서까지 하기가 싫었던 언니는 버럭 성을 냈고, 결국 파출도우미 두 사람을 불렀다고 한다.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이 언니의 매서운 지휘 아래, 그날 왔던 아줌마들은 아주 혼이 났다는 후문이다.
청소란 좋은 일이다. 주부라면 어질러진 집을 깨끗이 치우고 난 후의 기분이 얼마나 상쾌한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차곡차곡 쟁여진 그릇들로 가지런한 부엌, 뽀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청결한 욕실, 쏟아지는 햇살에 빨래가 말라가는 베란다 등은 우리 의식의 심층에 형성된 ‘즐거운 나의 집’의 준거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부로서의 본능이 미화원이라는 직업에 그리 도움이 되는 것 같지가 않다. 왜냐하면, 직업으로 하는 청소는 ‘열심히’보다는 ‘잘’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깨끗이 하는 데도 우선순위가 있다. 고객이 주로 다니는 동선(에스컬레이터 주위)이 먼저이고, 그다음으로 관리자들이 순찰돌 때 눈이 갈만한 곳이 신경 써서 청소해야 할 장소다.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미화원과 약간의 꾀를 부리더라도 ‘잘’하는 미화원이 있다면 이곳에서는 당연히 후자가 되기를 권한다. 그런데도 때로 나나 언니들은 ‘내 안의 주부’가 말썽을 부려서 반장이나 감독이 보기에 ‘쓸데없는’ 데 힘을 쏟기도 한다. 말을 안 듣는 사람, 고집이 센 사람, 자기 식대로 일하는 사람이란 낙인은 그렇게 찍힌다.
30.
매사에, 특히 이 글을 쓸 때면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반골성향 쪽으로만 사고가 발달해서 사고가 좁아지는 일, 다양한 관점에서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겸손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까 나는 두렵다. 섣불리 이분법적인 논리를 취하는 것은 깊이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게으른 자세다. 이사야 벌린이 말했다시피 “완전히 상충하는 선한 것”은 얼마든지 존재하며, 대세론에 무조건 반대하는 식의 사고는 대세론에 무조건 따르는 태도만큼이나 비주체적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생각이 얕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림으로써 실수가 잦은 나 같은 사람은 명심할 말이다. 겸손과 공감보다 자부심이 앞설 때 흔히 사람은 완고해지고 단정적인 의견을 취한다. 이 또한 열등감이 자부심으로 표출되기 일쑤인 내가 밑줄 긋고 암기해야 할 말이다.
이를테면 고객(기득권자)/미화원(사회적 약자)이라는 도식을 버리지 못하면, 어린아이를 돌보느라 쩔쩔매는 젊은 고객이 현재 특수한 처지의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거울을 온통 더럽히고 있는 ‘젊은 엄마’, 아이 손에 들린 과자부스러기에 무신경한 ‘젊은 아빠’를 향해 내가 미소 지으려 안간힘을 써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실 대부분 고객들은 상냥하고 예의 바르며, 자신들의 조그만 실수로 미화원들이 힘들어질까 봐 조심스러워한다. 그런 그들은 선량한 시민이자 나의 이웃이기도 하다. 공기가 혼탁한 도심의 백화점에 휴식을 취하러 올 수밖에 없는 그들이 진심으로 안쓰러울 때도 있다. 차이밍량이라는 대만 영화감독의 “왜 바람이 있는데 음악을 들으시나요, 구름이 있는데 영화를 보시나요?”라는 질문에 소설가 백민석이 이렇게 대답하겠노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거대도시에 살고 있고 그 외의 다른 삶은 모르기 때문이지요.”
31.
“마지막 술잔은 이미 오래전에 따라졌고,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한 마지막 손님들도 사라졌다. 웨이터는 술잔들과 재떨이를 모으고 천 조각으로 탁자를 닦고, 의자를 제자리에 정돈하며, 우리가 나가면 문을 잠그기 위해 입구에 있는 전기스위치에 손을 대고 기다렸다. 피로감으로 눈빛이 흐릿해진 이 사람이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Good night, gentleman(안녕히 가세요, 신사분들), 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모습은 각별한 존경이나 거의 해방이나 축복의 표시처럼 생각되었다.
―W. G. 제발트, 『아우스트리츠』 중에서
마지막 손님들이 일어서기만을 고대하는 웨이터의 모습에서 ‘하루치의 피로’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 대목을 읽다가, 폐점 직후 고객과 부딪힌 일이 문득 생각났다.
영업이 끝나기 직전의 백화점에 머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만한 광경이겠다. 폐점시간을 알리는 사인은 특정 노래를 배경으로 “오늘도 저희 백화점을 찾아주신…”이라 시작하면서 흘러나오는 인사말이다. 미처 쇼핑을 마치지 못한 고객들이야 아쉬움이 남겠지만, 판매직원들로서는 이 사인만큼 반가운 것도 없다. 이때 판매직원들 모두는 각자가 근무하는 매장 입구에서 부동의 자세를 취한 채 고객들을 눈으로 배웅한다. 고객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자세를 풀 수도,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수십 명의 직원이 퇴근시간을 초읽기 하며 목을 빼는 눈친데 모르쇠로 일관하며 버티는 고객들은 흔하다. 한번은 단아한 미모의 젊은 여자가 수입산 유모차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리저리 뜯어보며, 그것도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는 자세로 복도 한가운데 서서, 고객으로서는 ‘홀로’ 5분이 넘도록 남아있던 적도 있다. 그 여자는 폐점 직후의 ‘5분’이 직원들한테는 가히 50분과 맞먹고, 만약 스물네 명의 직원이 그 공간 안에 있다면 자기가 스무 시간에 버금가는 지긋지긋함을 그들한테 안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았더라도 여자의 행동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그러한 고객으로서의 특권을 오히려 느긋하게 즐기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고객이 퇴장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건 우리 미화원들도 마찬가지다. 치우고 나면 어지르고, 또 치우고 나면 어지르는 무한반복에서 벗어나 드디어 일을 매듭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소가 말끔하게 끝난 고객용 화장실에 뒤늦게 고객이 뛰어들어온 것이다. 지금이야 미화원으로서의 자세가 숙지된 상태인지라 충분히 참을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한 게 문제였다. 해도 내가 딱히 인상을 쓰거나 퉁명스레 굴었을 리는 없다. 뒤쪽으로 조금 돌아가서, 청소를 아직 시작하지 않은 후방화장실(직원용 화장실)을 이용하실 수 없겠느냐는 말을 조심스레 건넸을 따름이다.
이 소란은 결국 급한 볼일을 보고 나서도 분이 덜 풀린 고객이 나에게 한바탕 훈계를 하는 걸로 끝이 났다. 지금도 나는 나를 불러 세운 그 처녀아이가 팔짱을 끼고 눈을 내리깔며 “저기요 아줌마, 내가 고객이잖아요.”라던 모습이 생생하다. 돈을 쓰는 사람(고객)은 참거나 양보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만큼 자본주의의 속성을 천박하게 폭로하기도 어렵다. 인터넷 게시판에 항의하는 따위의 시끄러움이 싫어진 나는 비굴할 정도로 고분고분하게 사과했는데, 고객한테는 내 쪽에서 무조건 숙이고 드는 게 그때부터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헤겔 연구자들이 집필한 ‘헤겔 사전’에 따르면 좁은 의미의 드라마(Schauspiel)는 비극과 희극의 중간에 위치한다. 나는 요즘의 내 삶이 좁은 의미의 드라마 같다고 가끔 생각한다. 이날이 그런 나의 생각을 확증해준 경우였을 터이다.
32.
하루를 쉬고 출근하니 내가 맡아서 하는 층에 사고가 났다고 했다. 재발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라도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줄만한데, 친하게 지내는 언니가 쉬쉬하면서 귀띔해준 덕분에 간신히 알게 된 정보였다.
내가 휴무를 하는 날이면 돌아가면서 누군가 그 일을 한다. 이번에 그 누군가가 된 M이 남자고객화장실의 비데를 청소하다 그만 감전사고를 당했다는 거였다. 어쩌면 내가 당할 사고를 대신 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M은 말이나 표정이 어눌해서 남들로부터 약간 모자란 사람 취급을 당하는 이였다. 처음으로 한 조가 되어서 일을 한 날, M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를 몽땅 털어놓았다. 선하고 악함, 어리석음과 영악함이 상대적이라고 할 때, M은 그 천성으로 말미암아 누구보다 선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언니들은 툭하면 휴무일을 바꿔달라며 그녀를 졸랐다. 남들이 출근하기 싫어하는 날 일했으면 하고 바라는 상급자들의 요구에 M은 늘 선선히 응해주었다. “아이구, 착한 M!” “역시 M이 최고야!” M의 희생으로 자기들이 편해질 적이면 그들은 호들갑스럽게 M을 추켜올렸다. 그런 M이었으니, 사고를 당하고도 일을 다 마친 후에야 지하 5층에 있는 미화원들 방으로 내려왔다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때까지도 M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있었고, 놀란 사람들이 부랴부랴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간 모양이었다.
M은 별 이상이 없다는 병원 측의 말에 따라 며칠 후 퇴원을 했다. 혼자 사는 M의 퇴원을 감독이 도왔고, 하루나 이틀 “푹 쉬고 난” 다음에 출근한다는 감독의 말도 있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나흘이 지난 오늘까지도 M은 출근을 미루기만 한다. 아니 일부러 미루는 게 아니라 아파서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든다. 의사 말대로 M은 정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까? 그녀 심장의 이상 징후는 예전부터 잠복해있던 거고, 이번 감전사고 탓이 아니라는 말은 뭘까? 우리가 정기검진을 받은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기억기로, 적어도 그때까지 M의 심장은 매우 건강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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