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적 여정] (12)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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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규관 시인이 연재하는 ‘김수영의 시적 여정’은 매달 5일, 20일 뉴스민에 연재한다. 인용된 작품의 전문 수록은 저작권자와의 협의를 마쳤습니다.]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헬리콥터가 풍선(風船)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여 왔으며
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로밖에는 못해 왔기 때문이다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젊은 시절보다도 더 젊은 것이
헬리콥터의 영원한 생리(生理)이다

1950년 7월 이후에 헬리콥터는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이었고
이것이 처음 탄생한 것은 물론 그 이전이지만
그래도 제트기나 카고보다는 늦게 나왔다
그렇지만 린드버그가 헬리콥터를 타고서
대서양을 횡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동양의 풍자(諷刺)를 그의 기체(機體) 안에서 느끼고야 만다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그의 설운 모양을
우리는 좁은 뜰 안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볼 수 있고
이러한 우리의 순수한 치정(癡情)을
헬리콥터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을 짐작하기 때문에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자유
―비애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무제한의 시간 위에서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켜 가면서
안개처럼 가벼웁게 날아가는 과감한 너의 의사 속에는
남을 보기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보이는
긍지와 선의가 있다
너의 조상들이 우리의 조상과 함께
손을 잡고 초동물(超動物) 세계 속에서 영위하던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을
너는 또한 우리가 발견하고 규정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에 네가 전하는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

_「헬리콥터」 전문

이 작품은 김수영 자신의 ‘원한 없음’ 상태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직접적 힌트를 주며, 「달나라의 장난」에서 느꼈던 장쾌한 호흡을 다시금 보여준다. 다른 점은, 「달나라의 장난」이 역사적 현실의 심연 속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쓰였다면 「헬리콥터」는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은 이 작품에서 “자유”와 “자유의 정신”을 말하는바,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서 나타났던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이 드디어 그 추상성을 벗고 구체적인 삶의 윤리로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윤리적 태도는 “자유의 정신”을 낳고, “자유의 정신”은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게 하는 긍정의 정신을 낳는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계속 살아갈 정도로 삶의 일상적인 속박을 벗어버린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많은 것, 나아가 거의 모든 것을 질투와 불만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 도덕, 법칙, 사물에 대한 관습적 평가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는 이 상태의 기쁨을 기꺼이 전할 것이며, 아마도 이것 외에는 전해야 할 것이 없을 것이다.”(책세상, 59)

1연에서 시의 화자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헬리콥터를 자유를 향한 비상의 이미지로 채택한다. 진정한 비상은, 비상의 순간만큼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들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다. “우매한 나라” 즉 근대의 파국적인 역사를 소유하지 않은 나라, 아니면 그 역사에 대한 부정과 원한을 털어버린 나라. 그런 나라의 “어린 시인”들만이 무구하게 자유를 향해 비상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린 시인들”은 우화나 상징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자기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며 살아온 질곡의 역사는 헬리콥터의 이륙이 ‘가벼운 상승’인 것을 가르쳐줬다. 다른 말로 하면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은 비상을 가로막는 ‘중력의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도 된다. 언제나 ‘나’의 무거움은 ‘너’의 가벼움을 훨씬 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상대적 낙차가 주는 심리적 현상일 수도 있지만 무거움은 가벼움 쪽으로, 가벼움은 무거움 쪽으로 에너지가 움직이는 엔트로피적인 상황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 이건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라 사물의 비평형 상태가 갖는 속성이기도 하다.

이런 원론적 명제와는 무관하게 시의 화자는 “설움을 아는 사람”이며 이 “설움을 아는 사람”은 헬리콥터의 이륙을 보고 놀랄 수도 있고 놀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설움을 아는 사람”에게는 실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 “자기 말을 잊고/ 남의 말을 하”며 살던 시간이었다. “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로밖에는”. 이 언어 상실 또는 박탈의 기억은 “설움이 설움을 먹었던 시절”이다. “설움”으로 “설움”을 먹지 않고는 건널 수 없던 시절은 시의 화자가 생물학적으로 젊었을 때였지만, “풍선(風船)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역량을 가진 헬리콥터는 젊음을 “영원한 생리”로 가진다.

2연의 앞부분에서는 뜬금없이 헬리콥터의 전사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작품 내에 존재하는 긴장을 이완시키는 단순한 휴게 코너가 아니다. 2연의 중반부터는 20세기 근대사에 대한 암시들이 나타나는데 “1950년 7월 이후에”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이기 시작한 헬리콥터는 바로 20세기 근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헬리콥터는 “대서양을 횡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근대 서구 국가의 세력 확장과는 무관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동양의 풍자를” 느끼게 한다는 진술은, 서구 기술 문명의 이기(利器)인 헬리콥터를 이용해 어쩔 수 없는 “이 나라”의 근대사를 받아들이려는 시도로 읽힌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근대철학의 특징은 ‘연장과 사유’인데 여기서 ‘연장’ 개념은 사회, 정치적으로 유럽인들로 하여금 타자의 장소를 진공 상태로 인식하게 하였다. 타자의 삶이 존재하는 장소마저 그냥 자신들의 욕망이 연장되어야 할 추상적 공간이곤 했다. 식민 지배의 무의식적 바탕에는 이런 사고가 깔렸었다.

하지만 헬리콥터는 제트기나 카고가 갖는 그런 특징을 표상하지 않는다. 헬리콥터는 자신이 공간을 점유하면서 면적을 갖는 물건이 아니라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설움인 것이다. 헬리콥터가 그런 “설운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헬리콥터를 통해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면적을 갖는다는 것은 곧 영토를 갖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으며 영토는 언제나 지배와 정복의 결과물이다. 아니, 영토 자체가 지배와 정복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반면에 헬리콥터는 “비애의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양태를 갖기에 그것은 “좁은 뜰 안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항아리 속에서부터라도 내어다 볼 수 있”다. 헬리콥터는 면적을 지향하는 “동물”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아래의 시선, 즉 시의 화자의 시선에도 면적에 대한 욕망이 끼어들지 않는다. 면적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야말로 존재에 대한 긍정의 시간이다. 시의 화자는 헬리콥터와 우리의 관계가 이래서 “순수한 치정(癡情)” 관계라고 말한다. 왜냐면 면적을 갖지 않는 시선끼리는 실증적 증명이 필요하기보다 “짐작”으로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라는 2연 마지막의 진술은, 우리도 섧고 너도 섧고 “우리의 순수한 치정”도 섧다는 말에 다름 아니지만, 그 설움은 3연에서 말하듯이 동시에 “수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가”기에 “자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비애”일까? 김수영이 판단하기로는 “이 나라”의 현실은 이런 수직 상승을 통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에게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혁명적인 사건이 필요하단 인식이 이때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이 “설움”인 것은 산문적으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자유”이면서 “비애”인 것이 곧 “설움”이라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현실이라는 구체적 조건 때문일 것이다. 「헬리콥터」에서 김수영은 일종의 초월을 감행하고 있지만, 이것은 현실에 대한 절망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초월을 통하지 않고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전망은 예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비관적이다. (예술은 가끔 이렇게 정치적 패배를 먹이 삼아 최종적으로 승리하기도 한다.)

3연에서 말하는 “더 넓은 전망이 필요 없는 무제한의 시간”은 바로 이런 초월적 상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상승을 이루기 위해서는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진흙도 없고 진창도 없고 미련도 없이/ 앙상한 육체의 투명한 골격과 세포와 신경과 안구까지/ 모조리 노출 낙하시”키는 변화를 향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단 자체가 “긍지와 선의”이다. 그런데 “긍지와 선의” 같은 “자유의 정신의 아름다운 원형”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을 헬리콥터가 알려주고 있는 것이며, 지금은 다만 “네가 전하는 마지막 파편에/ 스스로 겸손의 침묵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비애”는 스스로 이루지 못한 그 무엇을 “1950년 7월 이후에”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인 헬리콥터가 깨우쳐줘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구축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회오 같은 것 말이다.

김수영은 이 모든 ‘더러운 역사’를 긍정할 수 있게 되면서 ‘원한 없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시인에게 주어진 일은 역사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판결하는 게 아니라 삶이 펼쳐지고 있는 내재적 평면으로서의 역사를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의 역사의식은 이런 것으로 보인다. 그가 훗날 다시 한번 「거대한 뿌리」에서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라고 할 때도 그는 그에게 주어진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받아들였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부정과 원한에 사로잡혀서는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헬리콥터」는 「거대한 뿌리」의 전사(前史)가 되며 「거대한 뿌리」는 「헬리콥터」의 반복이 된다. 두 작품에 차이를 부여한 것은 각각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폐허 그리고 4·19혁명과 그 이후의 환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