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병원 안에서 기자회견을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매일 현장에서 얼굴을 보니 사실 이제 조합원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조합원과 비조합원이 다를 바가 없어요.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녹록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저희가 해고된 지난 10년 동안 현장의 분위기가 많이 다운돼서 다들 노조가 정상화됐으면 하는 마음이 큰 거 같아요” _ 송영숙
지난 28일 오전 11시, 영남대병원 로비에는 “노동조합 원상회복”, “해고자 원직복직”, “영남학원 정상화” 등이 적힌 피켓을 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 대구지역 32개 시민단체와 정당이 모인 ‘영남대병원 노동조합 정상화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 준비에 한창이었다.
박문진(56), 송영숙(40) 씨도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에 참가한 사람들 뒤에 섰다. 각각 지난 88년, 98년에 영남대병원에 입사한 간호사이자, 지난 2006년 파업으로 해고된 보건의료노조 영남대병원지부 간부다.
2006년 당시 노조는 인력 충원, 비정규직 정상화 등을 요구하며 3일 부분파업을 벌였다. 950여 명 조합원 중에 150여 명이 참가했다. 3일 부분파업 이후 병원에는 노조를 감시하는 CCTV 16대가 등장했고, 조합원 800여 명의 노조 탈퇴서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노조 간부 10명이 해고되고, 18명은 정직, 감봉 등 징계를 받았다. 단체협약도 해지됐다.
박 씨는 “3일 부분파업을 했는데 이렇게 노조를 파괴한 건, 진짜 조직적이고 기획된 노조탄압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며 “창조컨설팅 심종두 노무사가 사측 노무사로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에 들어왔다. 유성기업에 가서는 우리 노조를 파괴했다고 자랑스럽게 브리핑까지 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노조파괴 전문으로 악명높은 창조컨설팅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부당해고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2010년, 대법원은 당시 해고자 10명 중 7명은 부당해고라고 인정했지만, 박 씨와 송 씨를 포함한 3명은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2009년 학교법인 ‘영남학원’ 재단 정상화 명목으로 재단 설립자(박정희) 가족인 박근혜가 이사 7명 중 4명을 선임했다. 박근혜가 대선 주자로 떠오르던 2011년부터 노조는 박근혜에게 영남대병원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선 기간 중 두 사람은 언론에 공개된 박근혜 일정을 따라 다녔다. 일정이 없는 날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자택 앞에서 기다렸다. 2012년 대선 유세 때 박근혜가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외치면, 이들은 ‘해고자가 행복한 나라’를 외쳤다. 박근혜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을 외치면, 이들은 ‘해고자가 복직되는 대한민국’을 외쳤다.
송 씨는 “보따리에 피켓을 싸 짊어 다녔다. 국회의사당으로, 당시 새누리당사 앞으로 삼성동으로 다녔다. 그림자 투쟁할 때도 숨어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피켓 펼치고 소리치니까 (지지자들과) 많이 부딪히기도 하고 맞기도 했다”며 “박근혜 유세 다닐 때는 정말 코앞까지도 갔는데 밀려나고, 그런 폭력적인 상황이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2012년 대선을 두 달 가량 앞두고 이들은 박근혜의 삼성동 자택 앞에서 3천배를 시작했다. 박문진 씨는 57일 동안 3천배를 마무리하고 바로 다음 날(2012.12.19), 처음으로 박근혜가 두 발로 집 앞을 걸어 나온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관련기사=[박근혜와 영남학원](3)영남대의료원 해고자 박문진, 송영숙에게 박근혜는···.(‘12.11.7))
박 씨는 “대선 하루 전날 3천 배를 끝내고, 그 여자가 당선됐을 때 저와 간부들이 굉장히 상심이 컸다. 많이 울기도 했다. 박근혜는 항상 차를 타고 들어가고, 차를 타고 나왔다”며 “제가 매일 3천배를 한 장소에 나와서 그 여자와 지지자들이 환호하는 걸 보면서 굉장히 상심이 컸다”고 말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병원은 교섭을 통해 해고 문제를 이야기하자는 입장을 전해왔다. 지역 시민단체들로 꾸려진 대책위도 제안을 받아들여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대화를 요구하는 사측에 응하고, 4년이 흘렀다.
박문진 씨는 “대화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고 시간을 보낸 게 벌써 4년이 됐다. 너무 시간이 길었다. 사측의 유동적인 이야기에 너무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는 걸 많이 반성하고 있다”며 “현장으로부터 점점 잊혀가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노조가 무너진 후 현장도 달라졌다. 생리휴가가 없어지고, 2년 동안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 인력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만성적인 연장근무로 노동강도는 더 악화됐다.
송영숙 씨는 “대구지역만 보면 대학병원 중에 간호사 임금 수준이 꼴찌다. 연 100명이 그만두고 나간다. 이번에 성심병원 장기자랑 문제가 불거졌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지 임신 순번, 사표 순번, ‘태움’ 문화는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박문진 씨도 “가장 중요한 건 현장 조합원들이 예전에 스스로 탈퇴했던 자책감도 있고, 굉장히 주눅이 들어있다. 노조가 깨지면서 현장 분위기도 많이 깨진 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며 “해고된 노동자로서 당연히 원직으로 복귀하려는 욕심이 있다. 저희가 원직 복직하는 것은 현장에 주눅 들었던 마음을 다시 세우고, 노동조합을 정상화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박근혜 정부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도 그때가 누구보다 기뻤다. 매주 열리는 촛불집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박근혜 측근들로 이루어진 영남학원의 적폐와 영남대병원 문제를 알리고 싶었다.
박 씨는 “작년에 캄보디아 의료봉사를 갔었는데, 촛불집회 소식을 듣고 한 달 일찍 들어왔다. 이 여자를 끌어 내리는 데 내가 꼭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영남학원이 마지막 남은 적폐다. 이제 영남학원도 박근혜의 손에서 시민의 손으로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조는 병원과 교섭을 이어가고, 병원 내 로비 피켓팅 등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영남대병원 노동조합 정상화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는 대구 시내 일대에 영남대병원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영남대병원장, 영남대 총장 등에게 면담도 요청할 계획이다.
송영숙 씨는 “매주 노동조합 소식지를 나누고, 조합원과 비조합원 구분 없이 만나고 있다. 한 주라도 소식지가 안 나오면 궁금해하신다”며 “앞으로 노동조합 활동도 다를 바 없이 간다. 5주 전부터는 로비에서 피켓팅도 시작하고, 범시민대책위도 나섰으니 병원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영남학원. 영남대학교와 영남대병원이 대구지역 마지막 적폐잖아요. 누군가 깃발을 들고 파열음을 내야 한다면, 우리가 그 출발이 됐으면 해요. _ 박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