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뉴스민은 아멜리 씨가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하는 ‘일상의 힘’ 가운데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을 필자 동의를 얻어 동시게재합니다.]
난 눈이 나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어느 날 저녁, 학교에서 교탁 넘어 칠판이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엄마한테 말했다. 그때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엄마한테 재차 이야기했고, 저녁을 먹고 산책 가듯 동네 안경점에 갔다. 안경점 아저씨가 시력 테스트를 하고, 눈을 들여다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아이고,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애가 눈이 많이 안 좋네.”
키가 자라고 몸집이 커지기 시작하니 시력도 덩달아 안 좋아졌다. 6개월에 한 번, 1년에 한 번씩 안경을 교체해야 했다. 성장이 멈추는 고등학생이 되니 나빠지던 시력도 차도가 없는 정도로 안정화(?) 되었다. 대구 동성로에 아주 큰 안과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을 찾을 때마다 엄마는 죄인이었다. 돋보기 같은 안경을 쓴 아이가 계속해서 시력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엄마는 후회했다. 잘 안 보인다고 한마디 던진 아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는 죄책감. 지금도 가끔 내가 눈이 피곤하다는 말을 하면 엄마는 죄책감을 느낀다. 어느 날부터 눈이 아무리 아프고 피곤해도 엄마에게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렌즈를 끼고 있다가 눈이 충혈되는 것도 엄마는 몸서리치게 걱정하기에 대구에 가면 하루 종일 안경만 쓰고 다닌다. 그녀가 수십 년 동안 느꼈을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다. 시력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안경을 쓰거나 렌즈를 끼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사람들의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다.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눈이 불편한 것도 일종의 장애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 정도의 경미한 장애는 누구나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장애를 보는 시각이 이 정도였다. 가족과 친지들 사이에 장애를 가진 분도 없었고, 나와 가까운 거리에서 장애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벌써 9년이 되었다. 9년 전 봄은 우리가족에게 2014년 4월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해 4월 3월은 목요일이었다. 엄마는 주말에 대구 한번 오라고 전화를 주었다. 왜 오라고 하냐고 물으니 그냥 내 얼굴이 보고 싶다고 했다.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고 내려가는 기차표를 사면서 친구랑 뭐하고 놀 지 전화로 수다를 떨었다. 동대구역에 여동생이 데리러 나왔기에 토요일 저녁엔 친구랑 놀 거라 쫑알거렸다. 엄마 집으로 가려면 동대구역을 지나 직진을 해야 했는데 우회전을 하기에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여동생은 막내가 병원에 있다고 했다. 막내가 왜 병원에 있냐고 했더니 다쳐서 병원에 있단다. 장난치지 마라고 꿀밤을 먹이는데 여동생은 웃지 않았다. 경북대병원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동생을 따라 병원 건물에 들어가 어느 병실 언저리에 다다르니 몇 달 사이에 늙고 추레한 모습을 한 엄마와 아빠가 복도에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 보면 울지 마라.”
아직도 기억난다. 막내를 만나면 울지 말고 웃으라고 한 엄마의 한마디. 그때 엄마는 얼마나 이를 꽉 깨물고 당신이 먼저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까.
스무 살 막내는 병실 침대가 꽉 차는 덩치로 목에는 구멍을 뚫어 호스를 연결한 채 누워있었다. 나를 보고 먼저 웃어주어 다행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원숭이가 내는 듯한 소리를 내던 막내는 말도 못하고, 손을 들어 내 손을 먼저 잡지도 못했다. 막내의 손을 잡는데 내가 꽉 잡지 않으면 싱크대에서 손질하던 오징어가 미끄러져 떨어지듯 흐느적거렸다. 다리에 힘이 다 빠지기 전에 병실을 나가서 엄마와 아빠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복도로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병실을 나와 복도 끝까지 가서 엄마, 아빠 얼굴을 제대로 봤다. 참았던 눈물과 콧물이 다 터져 나왔다. 왜 여기 내가 있는지 듣고 싶었다.
내가 막내를 만난 그날은 보름 동안 잠들어 있던 아이가 눈을 뜨고 중환자실을 빠져나온 다음날이었다. 아이는 사고로 머리를 다쳤고, 혼수상태로 헤매다 다시 이승에 돌아왔다. 눈을 뜨고 의식 하는 건 식구들 얼굴뿐이라고 했다. 아이는 말과 생각과 몸을 한순간에 잃어버렸고, 우리 식구는 몇 달 전과 다른 오늘을, 며칠 전과 다른 오늘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장애인과 함께 사는 가족이 되었다.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과거는 늘 너무 아련해 눈물 없이 회상할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주말이면 막내가 입원한 병원에 가서 재활치료를 도와주고 마사지를 해주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장성한 아이의 대소변을 도우러 화장실을 한 번 다녀오면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휠체어에 태워서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히고 다시 옷을 입혀 휠체어에 태우고 침대에 눕히는 일을 하루에 서너 번씩 하고 나면 온 몸이 아파왔다. 병원에 있을 때 저녁마다 휠체어에 막내를 태우고 병원 안에서 산책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종종 불러주었는데 어느 날 그 노래 가사를 기억해내어 부르는 막내를 보며 우린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며 좋아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코딱지가 코에 있어 불편하다는 말을 표현하지 못해 혼자 울고 부는 막내를 보며 우리가 다 죽어 사라지면 고통도 끝이 날까 생각했다.
사고가 나고 6개월 후 장애 진단을 받았다. 막내의 복지카드에는 ‘뇌병변 장애’라 쓰여있다. 왼쪽 뇌를 다쳐 오른쪽 팔다리는 여전히 불편하다. ‘사과’를 말하려고 했는데 막내 입에서는 ‘여우’가 튀어나온다. 깔끔쟁이 성향이 생겨서 막내의 방을 가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방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렬되어 있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못 참아 욕을 거침없이 한 적도 있었고, 온몸에 강직이 와 온 식구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든 순간도 있었다.
9년. 엄마는 그 시간을 죽을힘으로 살아 견뎌내고 있다. 앉지 못한다는 아이를 앉게 만들었고, 걷지 못한다는 아이를 걷게 했고, 말을 못하던 아이를 말하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애인 교육 기관을 수료했고, 2년 전부터 공공기관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막내의 사회생활은 험난하다.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배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막내가 부족한 것도 많다.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허다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부족한 채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렇게 살아내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다쳐서 장애를 얻은 것을 개인이 모두 책임져야 하나, 정부와 국가 또는 사회에 어디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부족한 사람은 늘 부족한 채로 나아질 기미가 없는 채로 살아가면 되는 것인가.
불편한 발로 걷다 보니 발목이 자꾸 돌아간다. 재활치료용 신발을 구입하면 국가에서 일부 보전해준다. 1년에 한 번 뇌 검사를 하는 비용도 일부 건강보험에서 지원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면 장애인 할인 적용도 받는다. 이런 지원이 크고 작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가끔 막내의 직장 생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눈물만 줄줄 흐를 때가 있다. 이해보다는 소외, 배려보다는 무시가 느껴지는 주변 상황들을 듣고 있으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살면 마음에 상처는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맴 돈다. 나조차도 장애인과 함께 일을 한 경험이 없기에 막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당황스러워 오해하고, 오해해서 폄하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예순이 넘은 아빠는 일흔까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막내가 살아갈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 당신이 가진 유일한 숙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저 막내가 남들처럼 사랑도 하고 가능하다면 결혼도 해서 아이도 낳아 키우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을 한 번은 해 볼 수 있기만을 기도한다. 남들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욕심이고,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기도하게 된다고 했다.
큰누나인 나는 그냥 막내와 같이 늙어가고 싶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 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내가 업고 다닌 놈이었다. 대학생 때에는 어느 집회에 데려가기도 했고, 영어며 수학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성교육도 해주었고,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심부름 두어 번 시키고 돈을 쥐여 주기도 했다.
막내는 축구와 농구를 좋아했다. 지금은 제대로 축구와 농구를 즐길 수 없다. 과거에 했던 일을 현재에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가끔 막내를 사무치게 괴롭힌다. 난 늘 막내가 그래도 살만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뭔가를 찾으려 애쓴다. 세상 모든 장애인과 그의 가족들이 이 땅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여기고, 한 명의 인간으로 대우받고 살아가길 기도한다. 늘, 기도한다. 내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또 기도한다.
예전에 막내가 죽고 싶다는 말을 카톡으로 남긴 밤이 있었다. 그 카톡을 보고 죽지 말고 나랑 같이 살자고 했다. 그리고 아랫글을 써 내려갔다. 앞으로도 내 욕심은 단 하나다. 막내가 우리 곁에서 웃고 울고 사는 거.
<막둥이>
막둥이는 운동장을 안마당처럼 뛰어다니는 외할매집 송아지 같은 아해였다. 나의 책상 위를 궁금해 했고, 내 책가방 열어서 공책 꺼내는 게 태어난 이유 같은 아이였다. 우리집 막둥이로 태어난 그 아이가 요즘 아픈 몸은 더 아프고 마음도 덩달아 아프다. 어젯밤에는 입에 담지 않길 바랐던 그 말을 침 뱉듯 내뱉었다. 야근하는 사무실에서 컴퓨터의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커서가 내 커다란 눈처럼 껌벅거렸다.
여동생이 임신했을 때 팔자걸음을 걷기에 안 예뻐 보이니 똑바로 걸으라고 타박을 줬다. 내가 임신을 해보니 불러오는 배 때문에 십일자로 걷는 게 불가능했다. 십일자로 걸어보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더 뒤뚱거렸던 동생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우린 막둥이에게 극복하라고, 할 수 있다고 말인지 똥인지도 모를 말을 내뱉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안 되는 것도 있다.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노력해서 하긴 하지만 잘 못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 싶어 하지 하지 않았다. 그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욕심을 ‘가능성’, ‘극복’이란 말로 포장해 하늘에서 융단 폭격이 땅을 향해 맹 질주하듯 아이에게 이런 달콤한 지옥의 말을 해댔다. 그 속에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자위도 동반했다.
늦은 밤, 한강 다리를 지나는 택시 안에서 막둥이가 사고 후 잠들었던 보름이란 시간이 떠올랐다. 보름 동안 우리가 모르는 세상을 여행하다 다시 이 땅에서 눈을 떴으니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인간이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도 다시 태어나는 거니까 다시 눈을 뜨고 희끄무레한 세상을 바라봤던 그 날이 다시 태어난 생일이 아닐까.
여덟 살짜리 동생이라고 생각하니 막둥이에게 해왔던 말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노력하고 극복하고 다시 시작하라던 말들이 신기루 같다. 그냥 그렇게 있어도 좋고 하고 싶은 걸 하면 더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아이가 되었다.
나는 네가 우리 곁에 온 그 날을 기억한다. 까만 머리카락에 동그란 코가 어여쁜 아이였다. 이제 나는 그냥 얼굴에 주름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너랑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