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래요. 행위에 대해서는 분노하죠. 절차를 밟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윤리특별위가 없지만 운영위원장이 긴급으로 사안에 대해 논의 구조를 만들어서 공식적으로 남겨야 할 것 아닙니까? 저도 너무 속상하고. 추석 명절 앞두고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부담이고, 이 나이에 제가. 며느리까지 다 보고 형제가 일곱이 다 대구에 사는데···. 합당한 조치가 나오면 시원하게 좋지요, 그런데 그걸 하겠어요? 새누리(자유한국당)가 훨씬 많은데, 쪽수가 많은데 어떻게 이깁니까. 언론이 날 도와줍니까. 언론은 특종만 하고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만 하면 되잖아요. 나만 상처받는다니까”
<동아일보>가 수성구의회 성추행 사건을 처음 보도한 9월 27일, 성추행 사건 피해자인 A 의원과 처음 연락이 닿았다. 꽤 긴 통화를 나눴다. 서상국 의원으로부터 “당사자한테 사과하고 사과를 받아들이는 거로 어제(26일) 마무리했다”는 답변을 들은 다음이었다.
A 의원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토했고, 의회가 공식적으로 문제를 다뤄주길 바랐다고 했다. 동시에 현실적 조건 때문에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체념했고,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수치심도 읽혔다. 전형적인 성추행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긴 통화 끝에 A 의원은 “지금은 기사를 쓰지 말고 당에서 대응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피해자를 우선해야 한다는 성추행 사건 기본 원칙에 따라 A 의원 부탁을 수용하기로 했다. 이미 많은 언론이 동아일보를 뒤따라 보도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굳이 똑같은 이야길 반복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 “언론이 날 도와줍니까. 언론은 특종만 하고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만 하면 되잖아요”라는 말이 비수처럼 와 꽂혔다.
17일 수성구의회는 성추행을 일으킨 서상국 의원 징계를 위한 윤리특위를 구성했다.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지난달 19일을 기점으로 약 한 달 만이다. 한 달 동안 사건을 수습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지난 12일 한 차례 파행한 회의는 17일 다시 열렸고, 비록 정회 중이었지만 기자와 관계 공무원들이 배석한 현장에서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수성구의회가 한 달 동안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못한 데 있다. 의회는 의회 체면 지키기에 급급해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를 우선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망각했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가해자보다 피해 여성에게 좀 더 큰 책임과 부담을 안기던 구시대적 관행을 그대로 답습했다.
<동아일보> 첫 보도 전까지 의회 내 일부 의원들은 사건의 내막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사건은 ‘쉬쉬’ 됐다. 김숙자 의장은 제주도에서 돌아온 그날(20일) 피해자 A 의원 집을 찾아가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물론 ‘여자인 당신이 더 상처받으면 어떡하냐’는 ‘걱정’으로 사건 무마가 포장됐다. “(서상국 의원과) 같은 당이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제가 되게 뭐라고 했어요. 그날 집에 와서 펑펑 울고 그랬는데···” A 의원은 의장과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9월 26일, 의장실에서 서상국 의원은 A 의원에게 사과했다. 김숙자 의장과 강석훈 부의장, 김희섭 의원이 배석했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바로 다음 날 <동아일보> 보도가 나오면서 국면은 급격히 전환됐다. 9월 19일에 있었던 사건이 뒤늦게 밝혀진 셈이어서 ‘사건 은폐’ 의혹도 제기됐다.
늦었지만 이 무렵에라도 의회가 피해자 우선 원칙을 세우고, 조기에 사건을 수습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 밝혀진 대로 같은 날 서상국 의원은 김희섭 의원을 통해 A 의원에게 돈을 건넸다. 병원비 명목이었다. 9월 29일 더불어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가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A 의원은 김 의원에게 따로 말하지 않고 받은 돈 봉투를 서상국 의원에게 되돌려줬다.
“이 제안은 서상국이 아니라 김희섭이 했다. 액수도 제가 정한다고 했다. 돈으로 해결되진 않지만 피해자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기로 했으니 치료비를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상식이다” 김희섭 의원은 17일 본회의에서 당시 돈을 건넨 경위를 설명했다.
A 의원은 9월 29일 기자와 통화에서 “상당히 불쾌하다고. 책상 서랍에 넣어놨어요. 문자도 남겼고, 그런데 이게 알려지면 김희섭 의원이 문제가 될 수 있어요”라며 김 의원을 걱정했다. 불쾌한 일이었지만 본인을 생각해 한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A 의원은 ‘거지도 아니고’, ‘미친 것도 아니고’라는 거친 언사로 서 의원이 돈을 건네온 사실 자체에 분노했다.
그 사이 김숙자 의장은 언론과 접촉을 완전히 피했다. <동아일보>는 첫 보도에서 김 의장이 “성인들이 술 먹고 장난친 정도로 알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의장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언론을 피하던 김 의장은 의장실에 있으면서도 의회 직원을 통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직접 찾아온 기자를 맞닥뜨려 낭패를 보기도 했다.
17일 열린 본회의는 구시대적 관행으로 사건을 처리한 의회 모습을 보여주는 압축판이었다. 사건 축소·무마 의혹을 산 의장 불신임안은 압도적인 반대로 부결됐다. 심지어 비(非)한국당 의원 10명 중에서도 최대 4명이 불신임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의장은 잘못한 게 없다는 동정론이 번졌다. 한 민주당 의원은 정회 중에 “의장이 왜 사퇴해야 하느냐”고 목소리 높이기도 했다.
김희섭 의원은 돈을 건넨 일로 윤리특위 위원 선임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자, 직접 나서 경위를 해명하면서 “제가 왜 안 된다는 건지 설명해달라”고 항변했다. 김 의원 해명 직후 한국당 김삼조, 황기호 의원은 기자들에게 다가와 “서상국 의원이 돈 준 게 아니지 않으냐, 이건 바로 잡아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A 의원이 봉투를 받아들고 느꼈을 모멸감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수성구의회 B 의원은 “내가 하는 행동이 선의였다고만 이야길 하지 그 행동으로 피해자가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에 대한 인식이나 행동의 결과, 미치는 영향, 그것이 2차 가해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다는 게 드러났다”고 자평했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구성된 윤리특위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윤리특위가 서 의원 제명을 결정해 본회의에 회부한다 해도 본회의 가결이 이뤄질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의원 제명은 전체 의원 중 2/3가 동의해야 한다. 전체 의원이 20명인 수성구의회에선 14명이 제명안에 찬성해야 한다. 수성구의회는 9명이 한국당 소속이고 11명이 비한국당이지만, 제명안 당사자인 서 의원을 제외하면 10명이다.